[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배우 김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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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를 돌아봅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에 남는 한 사람을 꼽자면 바로 배우 김혜자 선생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꼭 1주일 만이었습니다.
사실, 만나기 전부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인터뷰 사진을 밝고 화사하게 찍을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 고민은 저 만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사고 전에 잡힌 인터뷰 약속이라 어쩔 수 없이 왔지만 사진 꼭 찍어야 하나요? 참 마음이 무겁네요.”

마치 상복 같은 검은 옷차림으로 연극연습실에 온 김혜자 선생 또한 무거운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저도 착잡합니다. 혹시 극 중에 눈물 흘리시는 장면 있습니까?”

“실제 우는 장면은 아니지만, 항상 울컥해지는 대사가 있긴 있어요.”

“그렇다면 그 대사를 연습하듯 한 번 해주십시오.”

“알았어요. 한번 해볼게요.”

연습실 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극 중 장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감정을 잡고 차분하게 대사를 읊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처음에는 과대평가해요. 영원한 삶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다가 또 과소평가해요. 지긋지긋하다느니, 너무 짧다느니 하면서 내동댕이치려 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요. 결국 선물 받은 게 아니라 잠시 빌린 거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빌린 거니까 잘 써야죠….”(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대사 중에서)

잠깐의 읊조림에도 이내 눈물이 맺힙니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는 눈물,
연극 연습이 아니라 숫제 흐느낌입니다.
차마 그만 우시라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진을 찍는 저도 먹먹해 집니다.
진정을 하는 데 한 참이 걸립니다.

취재기자가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극 중 장미 할머니가 오늘 우리 사회로 와서 희생자 가족들을 만난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아무 말 없이 옆에 가만히 앉아있었을 것 같아요.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에 누구의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어요.
내 자식이 그 배 속에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 말 말아야 해요.”

대답을 하며 또 눈물을 훔쳤습니다.

권혁재 사진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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