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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한가위엔 포근한 동화 어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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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마틸다 (초판 2000년) 로알드 달 글,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시공주니어, 310쪽, 6500원
몰라쟁이 엄마 (초판 2002년) 이태준 지음, 신가영 그림, 우리교육, 6500원
아빠는 전업주부 (초판 2003년) 키르스텐 보이에 지음, 박양규 옮김, 비룡소, 204쪽, 7000원

1주일 뒤면 추석 연휴다. 밤하늘을 밝히는 둥근 보름달처럼 벌써 마음이 넉넉해진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척들도 그립다.

짜증나는 귀성.귀경길, 북적북적한 고향마당,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으며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는 동화책 세 권을 골랐다.

초가집 지붕 위에 복스럽게 익어가는 박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가족간의 사랑이 있기에 한가위는 언제나 즐겁다.

지난 겨울 늦은 밤. 지하철 안에서 대 여섯 살 된 여자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초라한 옷차림처럼 엄마 역시 앞가슴에 고단한 생활의 흔적이 범벅된 낡고 검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아이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니"라고 물으면, "엄마"라고 대답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도 "우리 엄마"라고 말할 것이다. 그 아이가 말하는 엄마는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엄마, 아버지, 우리 집, 내 자식, 이렇게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오는 우리의 가족. 그러나 살아가기에 바빠 '우리의 집'은 가족의 그림자만 아침저녁으로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이상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추석이란다. 우리의 추석은 모임이며, 잔치이다.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가족, 바쁜 탓에 함께 식탁에 앉지 못한 채 지내던 가족, 갖은 이유로 원수처럼 지내던 가족, 이렇게 슬프거나 섭섭하거나 안타까웠던 가족이 추석이라는 명절 덕분에 한 지붕 아래에 모여든다. 그래서 명절은, 추석은 가족에게 서로를 돌아볼 수 있고, 맺힌 것을 풀며,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부모와 자녀가 텔레비전을 끄고, 명절이면 으레 펼치는 담요를 걷고,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마틸다'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부모이건, 선생님이건 대부분 아이들의 적이다. 그 적들에게 아이들은 억울하게 당하기도 하지만 통쾌하게 복수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마틸다는 승리한다. 방긋방긋 웃으며,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네!" 하고 대답하는 아이들. 그러나 아이들은 마음속엔 어른에 대한 불평불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마틸다'를 읽으면서 즐거워한다. 그만큼 아이들은 집과 학교에서 많은 모순과 억압, 어른들의 이중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말이다. 집이 정말 천국일까? 부모님은 정말 나의 수호천사일까? 선생님은 정말 착한 사람일까? 이 책을 자녀와 함께 읽는 부모 중 어떤 이들은 자녀의 얼굴을 몰래 쳐다 볼 것이다. 내 자식이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런 다음 '몰라쟁이 엄마'를 읽게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아버지와 엄마는 저들의 아버지와 엄마를 그리워하게 되고, 아이들은 저들의 엄마와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특히, 추운 겨울 정거장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작은 여자아이는 엄마(가족)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이내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 우리 엄마 안 오? " "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차장은 '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오?"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이 차장도 '땡땡'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전차가 또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오?" "오!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구나" 하고 이번 차장은 내려와서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 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 하고 갔습니다. 아가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 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마틸다'에서 한바탕 부모자식 사이의 전쟁을 치른 우리들은 이 글 속에서 이 세상 누가 뭐래도 부끄러움 없이 제 자신을 부대낄 곳은 우리의 집이며, 우리의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30, 40년대의 말투로 쓰인 탓에 가족이라는 엿가락처럼 끈적끈적하면서도 그만큼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에 추석 오후가 한층 넉넉해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 곁에 징그러울 정도로 착 달라붙어 있다. 심지어는 가족이고, 뭐고 생각하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냉정하다. 그래서 '아빠는 전업 주부'를 읽을 수밖에 없다. "가족? 소중한 거 알죠. 하지만 어쩝니까? 소중한 가족을 위해 이러는 건데…." 부모들은 힘든 현실 속에서 늘 이렇게 말한다. 12살 소녀, 넬리의 부모도 그렇다. 어찌하다 보니 엄마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고,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일 년 반 동안 그야말로 가족 간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넬리의 가족은 평화를 얻는다. 그 과정은 복잡하지만 해피엔딩의 원인은 가족 서로의 이해다.

가족과 친척의 오고 감, 기름냄새와 솔잎 익는 냄새, 화려한 추석 빔의 행렬, 아이들의 웃음소리, 텔레비전의 요란한 추석특집 프로그램. 추석이라는 명절 속에서 벌어지는 풍성함과 유쾌함. 그러나 우리의 가족이 온전히 얼굴과 마음을 마주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잔치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소란에 불과하다. 다시 한번 그 겨울 지하철에서 만난 모녀를 생각하며, 명절이기에 더욱 애틋하게 여겨지는 우리의 가족을 책 속에서 함께 만난다.

노경실 (동화작가)

◆더 읽어보면 좋은 책들

『솔이의 추석 이야기』
이억배 글·그림, 길벗어린이

『복실이네 가족사진』
노경실 글, 이혜원 그림, 산하

『집 나가자 꿀꿀꿀』
야규 마치코 글·그림, 고향옥 옮김, 웅진닷컴

『아빠, 수염이 따가워요』 
울리히 마스케 글, 질케 브릭스 헨커 그림, 김지연 옮김, 어린이작가정신

『할아버지도 예전에 어린아이였단다』
타말 버그먼 글, 이형진 그림, 장미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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