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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⑧기술진보] 73. 성장 동력 원자력 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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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

북한이 1948년 5월 14일 남한 송전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서울 당인리와 강원도 영월의 화력 발전소 정도가 고작이었던 대한민국은 산소 호흡기에 생명을 의지한 환자처럼 미국에서 급파한 두 척의 발전 선박에 산업과 생활의 동력인 전기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57년이 흐른 2005년, 대한민국은 개성공단에 전기를 보내기 시작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바로 원자력이다. 현재 발전량의 38%를 담당하는 원자력이 아니고서야 전기가 남아돌아 북한에 지원까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의 원자력 발전과 관련한 기술은 세계에서도 제일 앞선 수준이다. 한국은 세계 선진 10개국이 함께하고 있는 차세대 원자로 개발 사업에도 당당히 끼여 있다.

원자력 강국으로의 첫걸음은 59년 일찌감치 내디뎠다. 바로 그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됐다. 그러나 연구는 아주 소규모였다. 원전을 우리 손으로 짓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78년 경남 양산에 첫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원전이 완공됐지만, 그건 순전히 미국 기술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 한쪽에서 원자력연구소 과학기술자들은 원전 기술 국산화의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요즘 주 5일제니 주 40시간 근무니 하는데, 70년대 후반 연구원들은 냉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연구실에서 주 7일, 70∼80시간을 일했다.

국산화는 핵연료에서 시작됐다. 80년대 중반 구식 원전인 중수로 연료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원전 에피소드 참조). 다음은 경수로 연료의 차례였다. 여기서 1차 한계에 부닥쳤다. 중수로 연료 기술은 우리끼리만으로도 개발할 수 있었지만 훨씬 까다로운 경수로 연료는 그게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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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바꿨다. 대가를 치르고 선진국에서 기술을 들여오기로 했다. 그 상대로 독일의 핵연료 전문 회사인 KWU가 선정됐다. KWU는 다른 어느 회사보다 많은 핵심 기술을 전수해 주겠다고 했다. 연구원들을 독일로 보냈다. 거기서도 우리 연구원들은 밤을 새워 일하는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KWU의 연구소가 오후 8시면 정문을 걸어 잠그는 통에 집에 가려고 담을 넘다가 경비원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른 사람도 있었다.

89년 드디어 한국핵연료주식회사(현 한전원전연료주식회사)가 탄생해 핵연료 국산화의 꿈이 이뤄졌다.

다음은 원자로의 국산화에 도전할 차례였다. 이건 더욱 어려운 과제였다. 이번엔 미국 회사를 택해 기술 이전을 받기로 했다. 44명의 연구진이 대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이 회사는 이 핑계 저 핑계로 핵심 기술 전수를 회피했다. 당시 연구진을 이끌던 이병령 박사는 강공책을 펼쳤다. 계약을 파기하고 철수하겠다고 했다. 그제야 상대방은 조금씩 기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대로는 아니었다. 이번엔 모두 박사학위를 갖고 있던 우리 연구진이 상대방 회사의 기술자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붙잡고 원리 문제에 대해 이론적인 토론을 벌였다. 그냥 기술자인 그들이 우리의 박사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해박한 기초 지식을 지닌 우리 연구진을 점점 인정하게 됐고, 결국 핵심 기술도 순순히 알려줬다.

우리 연구진은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효율까지 높인 새로운 원전을 설계해 98년 마침내 한국형 원전 1호인 울진 3호기를 가동시켰다. 현재 가동 중인 원자로 20기 중 영광 5, 6호기 등 모두 6기가 바로 이런 한국형 원전이다.

원전까지 설계해 만드는 한국은 원자력에 관한 한 선진국이다. 하지만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 연료의 원료인 우라늄 농축 기술이 없다. 미국이 주도해 만든, 핵에 관한 국제 규정상 우리나라는 우라늄 농축과 관련된 기술 개발을 할 수 없게 돼 있다. 과학자들 나름대로 시험 삼아 약간 농축해 본 게 과장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지난해 원자력 연구소와 우리 정부를 사찰까지 했다. 세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와 우리나라가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핵연료 기술의 완전 국산화를 위한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날은 언제일까.

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논란

원자력발전은 촛불을 전기불로 바꾸고, 산업의 동력을 공급했지만 방사선을 발산하는 쓰레기를 배출했다. 이 쓰레기 처리장 건설을 놓고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1990년 안면도 사태,94년 양산·울진 사태,95년 굴업도 사태, 2003년 부안 사태 등이 방사성쓰레기 처분장(원전센터)때문에 발생했다.원자력 발전의 어두운 부분이기도 하다.올들어서는 전북 군산, 경북 영덕·포항·경주 등 네곳이 원전 센터를 유치하겠다며 산자부에 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원전센터를 둘러싼 분쟁은 언제 또 터질지 모를 뇌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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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에피소드
연료실험 캐나다행 서경수 박사
“실패하면 태평양에 뛰어들겠다”

1982년 말 캐나다 몬트리올 공항. 귀국 비행기를 기다리던 한국원자력연구소(당시 에너지연구소) 서경수(흉상)박사는 한숨을 지었다. ‘캐나다원자력에너지’라는 업체와의 협상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연은 이런 것이었다. 국내 기술로 중수로 연료를 개발했는데 한국전력에서 조건을 붙였다. 연구용 원자로에서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원자력연구소는 실험을 할 만한 원자로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캐나다를 찾았다. 캐나다원자력에너지의 시설을 빌려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제시한 금액은 40만 달러. 캐나다 쪽은 300만 달러를 불렀다. 합의가 될 리 없었다. 결국 실패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공항에서 한숨만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쪽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캐나다원자력에너지 부사장이었다. 그러더니 계약을 하자고 했다. 서 박사는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공항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한 관문은 넘었다. 그러나 더 큰 고비가 남았다. 우리가 개발한 핵연료가 실험을 통과해야 했다. 83년 초 연료 세 다발을 가지고 캐나다로 가면서, 당시 연료 개발을 이끌었던 고 서경수 박사는 “실패하면 태평양에 뛰어들겠다”고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 84년 6월 최종 결과가 나왔다. 성공이었다. 핵연료로 쓰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게 원자력 기술 국산화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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