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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덧나는 현대사 상처, 이젠 꿰맬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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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국 근현대사의 '덧나는 상처'인 친일 등 과거사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민족문제연구소가 8월29일 발표한 친일파 3090명 명단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 공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 두 권의 책이 있다. 소설가 복거일씨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가 친일파 처벌을 주장하는 '쉰 목소리'들에 대한 '노!'의 목소리라면, 서양사학자 박지현씨의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는 2차 세계대전 말 프랑스의 꼭두각시 비시 정권의 사례연구를 통해 '완벽한 과거사 청산'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복거일 지음, 들린아침, 534쪽, 2만원, 2003년8월 발행

2039년 10월 26일 유신독재 종식 60주년을 기념하여 독재청산문제연구소는 친독재인사 명단 3090명을 발표하였다. 명단에는 유신시절 판검사를 지낸 사람 모두가 포함됐다. 이유는 사법고시를 통해 유신체제에 가담했던 앞잡이라는 것이었다. 발표 뒤 나라가 들끓었다. 2000년 초반 집권했던 전직 대통령도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판검사를 했다고 친독재인사라고 할 수 없다는 일부 반론이 제기되었으나 사람들은 이를 모른 척 했다.

물론 내가 잠시 떠올려본 미래 가상이다. 며칠 전 발표된 친일파 명단 3090명을 둘러싼 소동이 갖는 위험성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2년 전 나온 책, 그러나 사회적 논의에서 소외됐던 소설가 복거일의 '죽은 자를 위한 변호'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책에서 소설가 복거일은 친일파 변호를 자청한다. 대중적 정서를 거스르는 도박이기에 그는 친일문제에 관련된 네 가지 가정이 근거가 박약하다는 점부터 밝힌다.

즉 1) 친일행위들은 뚜렷이 정의될 수 있다. 2) 친일파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하다. 3)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들에 대해 그 죄과를 묻고 판결을 내릴 만한 법적 도덕적 권위를 지녔다. 4) 그런 판결은 우리 사회 발전에 필수적이다. 이런 숨겨진 가정을 공격하는 것은 복거일 식 논파법의 특징이다. 물론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자료를 근거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간단치 않은 친일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친일 행위는 이제 역사적 사건이므로 역사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시민단체나 매스컴이 아닌 전문가가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1년여 전의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해서도 해석이 각양각생인데 하물며 70여 년 전의 사건이 아니던가.

다음으로 저자는 친일문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라는 주제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글픈 얘기지만, 거의 모든 증거들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조선조 왕조의 통치 아래에서보다 잘 살았다는 외국인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같은 노선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조선의 근대화가 식민지 지배의 목적이 아니라 단순한 결과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즉 일본이 조선이란 국가를 근대화시킨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 조선을 개발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독립 후에 근대화란 미명으로 포장된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에 전적으로 해로웠고 조선에 이로운 측면은 전혀 없었다는 가정을 반박하는 것이지만 이때의 조선이 국명인지 지명인지를 분간해야만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친일파 청산과 함께 저항 운동 연구에 보다 많이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민족정기를 높이는 데는 부끄러운 친일 행위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보다는 조국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나 역시 동의한다.

다시 말해 파사현정(破邪顯正) 전략보다는 현정파사(顯正破邪)가 낫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삼청교육대 만들어 깡패를 없애면 정의사회가 구현되고, 부동산 투기꾼을 잡으면 집값이 안정될 것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반대다.

즉 정의사회가 구현되면 자연스레 깡패가 없어질 것이고, 집값이 안정되면 부동산 투기꾼이 없어질 것이다. 독립투사를 계속적으로 발굴하고 극진히 예우하면 할수록 친일파는 더욱 더 초라해질 것이다. 실은 복거일 같은 사회적 소수의 목소리는 외롭다. 모든 사람이 맹목적으로 앞 만 보고 뛸 때 그는 뒤를 보기 때문이다.

탁석산.철학자.'한국의 정체성' 저자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박지현 지음, 책세상, 184쪽, 4900원, 2004년 8월 발행

'신화의 시대'에서 '기억의 시대'로. 독일 점령(1940년~45년) 하의 비시 프랑스라는 유령이 그려온 궤적이다. 패전, 독일점령과 비시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졌던 5년은 프랑스인들에게 어두운 과거였다. 종전 뒤 수치스런 독일의 꼭두각시 정권인 비시 프랑스의 유령 앞에 프랑스인들은 신화에 기댔다. 드골의 집권과 함께 부각된 그 신화란 "소수의 대독 협력자를 제외하면 대다수 프랑스인들은 나치 지배에 저항했다"는 레지스탕스의 장렬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1968년 혁명은 분기점이었다. 기존 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환멸은 비시 시대에 대한 비판을 자극했고 부끄러운 기억들이 봇물처럼 들춰졌다. 기억의 시대 도래 앞에 자발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인들이 부각됐다. 이때 나치에 저항했던 프랑스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프랑스는 죄악의 발상지로 변해 버렸다. 역사학은 방향 상실의 위기 앞에 비틀거렸다.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의 저자는 이렇게 의문을 털어 놓는다. 이어지는 고백은 한국 근대사로 이어진다.

"(그 이전)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가, 국외에서는 망명정부인 드골 정부가 독일과 대항해 싸웠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과거사 청산에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로 프랑스를 꼽고 있는데, 그들 역시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던 것일까?"(7~8쪽)

"그들의 현주소는 나의 시대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특히 일본강점기와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한국인들은 반일 대 친일, 좌파 대 우파의 이분법이 지금껏 갈등으로 남아있다. 총체적 과거사 청산이라는 개념을 세워보지도 못한 채 일제 강점기에서 이념의 시대, 민주화 시대, 개혁 시대로 정신없이 달려왔다."(9쪽)

파리1대학에서 비시 체제 연구로 학위를 받은 저자의 이 책은 1940년 전쟁 패배는 독일의 힘에 의한 것만이 아니고, 프랑스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규명해낸다.

전쟁 이전부터 프랑스 사회 내부에 존재했던 좌우 대립, 파시스트 등 이념의 범람과 실패의 결과라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프랑스인들은 이제 비시 체제를 단순히 대독일 협력체제로만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랑스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인 것이다.

국내 학자에 의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시 연구라 평가받을 수 있는 이 책의 저자가 도달한 종착점은 한반도. 그리하여 "일제 치하의 한국인들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 이해하는" 도식에서 탈피하여 그들의 "총체적인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의 밑바닥에는 점령의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삶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 어두운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진정한 초석이라는 성찰이 깔려있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와 일제시대 역사의 만남은 아쉽게도 여기에서 멈춘다. 4년에 불과했던 나치의 점령과 36년을 지속했던 일본의 점령의 경험을 수평적으로 비교하고 프랑스식 과거청산을 하나의 모델로 삼는 것에 저자는 반대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프랑스의 역사와 우리 역사와의 만남이 끝나야 하는 것일까? 이 시점에서 프랑스식 과거 청산의 경험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없는가?

과거에 대한 억눌린 기억이 머지않아 엄청난 반대 기억의 홍수를 몰고 오고 온갖 종류의 기억의 범람 속에서 과거의 모습은 오히려 왜곡되었던 프랑스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어두운 시절에 대한 폭로와 비난의 와중에서, 기억의 오용과 남용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차별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반성에서 귀담아 들을 부분은 없는가? 신화와 선별된 기억, 억압된 기억을 넘어 과거사와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김용우.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서양사

조금 더 읽으려면 …

1개월 전 나온 책 '세계의 과거사 청산'(안병직 등 지음, 푸른역사)제작을 준비하던 출판사의 편집팀은 당혹스러웠다. 본래 책 뒷 편에 친일.과거사 관련 참고도서 목록을 만들기로 했는데, 의외로 양질의 책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업은 포기를 했다. 친일.과거사 청산문제란 그만큼 마음이 앞섰을 뿐, 그동안 정교한 이론적 검토는 부실했음을 보여주는 얘기다. 어쨌거나 이 분야의 저술 중 임종국의 선구적 저작 '친일문학론'(민족문제연구소, 2002년 재출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66년에 첫 선을 보인 이 책은 이후 '친일정치 100년사'(김삼웅 지음,동풍,1995년)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증언 반민특위'(정운현 지음, 1999년) '실록 군인 박정희'(정운현 지음, 개마고원, 2004년)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과거사 정리의 이론적 작업 이전에 단순 다큐멘터리에 머문다는 한계를 가졌다. 친일행위를 한 개인들의 행적 보고서 내지 자료집에 그친 셈이다.

외국의 사례를 담은 책으로 기억할 만한 것은 '프랑스 대숙청'(주섭일 지음, 중심,1999년)이 꼽힌다. 이 책은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 비시 체제 협력자 청산문제를 과거사 정리의 모델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저널리스틱한 이 책은 최근 사학계의 성과와 동떨어졌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앞의 책 '세계의 과거사 청산'저자들은 완벽한 과거사 청산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으며, 이렇다 할 모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비시체제 청산작업 역시 완벽한 과거사 청산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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