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연체, 전기 통하게… 현대 물리학 56년 숙제 한국서 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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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50여 년간 현대 물리학의 과제였던 '절연체가 전기가 통하는 금속물질로 바뀌는 현상'을 세계 최초로 입증했다.

ETRI 내 기반기술연구소의 테라전자소자팀(팀장 김현탁 박사)은 1일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물질에 전압을 가하면 전류가 통하는 금속물질로 바뀌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실험을 통해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모트 교수가 1949년 "어떤 금속물질의 경우 전자 간에 서로 미는 강력한 힘으로 인해 전류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로 갑자기 바뀔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면서 '모트 절연체'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56년 간 세계 물리학자들이 모트 교수의 가설의 원리를 입증하기 위해 연구했지만 지금까지 입증하지 못했다.

ETRI 김현탁 박사 팀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트 절연체로 알려진 100여 개 물질 중 하나인 바나듐옥사이드를 가지고 실험에 착수했다. 외부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바나듐옥사이드는 전류가 통하지 않았다. 여기에 미세한 전압을 가하자 팽팽하게 밀고 당기던 전자 간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전압으로 인해 전자 하나가 밖으로 퉁겨나가면서 구멍(정공)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바나듐옥사이드는 전류가 통하는 금속물질로 바뀌었다.

물론 전압을 가하지 않으면 예전의 절연체로 돌아갔다. 이는 일정한 전압을 가하면 도체로 변했다가 전압이 없으면 부도체로 바뀌는 반도체와 같은 원리다. ETRI 김 박사팀은 모트 교수의 가설을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 입증한 셈이다. 즉 절연체에 전기를 통하게 한 것이다.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해 일본 쓰쿠바 대학의 야스모토 다나카 박사는 "김 박사팀의 아이디어와 개념은 많은 연구자와 기업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라며 "한국도 이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뛰어난 후보자를 보유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김 박사는 "모트 절연체는 디지털 전자제품의 성능과 크기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며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와 광소자.차세대 디스플레이 등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박사는 "모트 절연체는 모래에서 추출한 반도체의 소재인 실리콘보다 1만~10만 배가량 전류가 잘 통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모트 절연체를 메모리 반도체의 소재로 사용한다면 기존의 반도체보다 크기를 확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리콘의 경우 일정 크기 이하면 전류가 통하지 않아 반도체 크기를 줄이기 어렵다.

실제 미국 IBM은 2000년 김 박사팀이 입증한 이론과 유사한 이론을 이용해 연구한 결과 반도체를 5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크기로 제작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20년간 100조원 규모 이상의 시장을 창출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 ETRI는 기존의 공정 기술로는 10여 개의 부품이 필요한 열 감지 센서를 모트 절연체를 이용해 3개의 부품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와 함께 모트 절연체로 만든 전류 차단기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과전류가 흐르면 즉각 전류를 차단해 귀중한 전산장비를 보호할 수 있음도 확인했다.

김 박사는 "ETRI는 원천응용특허 16건을 국내외에 출원했다"며 "앞으로 모트 절연체를 실용화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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