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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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일요일에 구로동 근로자 밀집 지역을 돌아보면 대개가 밀린 빨래하고, 점심때가 가까워질 때까지 늦잠을 자거나, 만화방에 가서 푼돈 내고 스포츠 중계를 보고, 아니면 저녁때에는 남녀가 패를 지어 인근 극장에 들어온 쇼를 보러갔다. 친목회 모임이 공장별로 있기는 한 모양인데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어느 주말에 내가 마도로스와 공장에서 내 사수인 숙련공 청년에게 쇼를 보러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이 부근의 문화적 분위기를 보고 싶었다. 마도로스는 '우리 나이가 몇인데…'하면서 쑥스러워 했지만 사수는 혼자 가기가 뭣해서 못 가고 있었는데 여럿이 가야 재미있다면서 여공들에게도 '같이 갈 사람은 낼 저녁에 어디 어디로 나와라'고 광고를 했다. 구로극장에 '하춘화 쑈'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마도로스와 나는 그래도 나이가 삼십이라 아저씨나 마찬가지였다. 이튿날 종점 부근에 가서 서있노라니 우리 사수는 밝은 베이지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타났고 다른 이십대의 남녀 공원 서너 명도 모두들 옷을 잘 빼입고 들떠서 손을 흔들며 길을 건너왔다. 쇼는 연속으로 진행 중이었는데 아마도 영등포 중심가에서부터 구로동과 시흥 또는 안양 일대의 변두리 영화관이 비슷한 쇼 프로를 내걸고 연속으로 겹치기 공연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가수들의 순서가 뒤바뀌고 간판급 가수는 출연 시간이 긴 때도 있고 아예 나타나지 못하는 막간도 있었다. 하여튼 영화관 안은 초만원이었는데 거의가 공단 부근의 젊은 공원들이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고 탄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고 울고불고했다. 쇼가 끝나고 벌써 어둠이 깔린 거리로 나왔지만 우리는 달리 갈 데도 없었다. 젊은 것들은 디스코를 추러 간다며 시장 골목으로 사라졌는데 공원들이 모이는 지하의 음악다방에서 귀청이 떨어지도록 크게 틀어주는 디스코 리듬에 몸을 털다가 맥주 몇 잔 마시고 나올 것이라고 했다. 마도로스가 말했다.

-그래야 또 일주일 뭣 빠지게 야근할 거 아니냐.

나는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이라는 영국 소설이 생각났다. '뷰티풀 선데이'라는 솔 풍의 미국 노래도 생각이 났고. 젊은 공원들은 그냥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외로운 존재이거나 거의 빈손인 채로 아무렇게나 소비 시장 한복판에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노동자가 스스로 자각하고 모이고 실천을 하게 되기까지의 모든 것이 '문화적 소통'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정치적 행동은 그 다음 단계의 일이 될 것이다. 이 무렵부터 생각 있는 종교인들은 산업 선교를 시작했고 보다 뒤늦게 학생들의 노동자 야학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현장문화운동이라는 개념과 행동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직장을 소개했던 이 반장은 다른 작업장에 있어서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았고 어쩐지 그는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대신에 나는 우리 연마반 3개조 전체를 총괄하는 홍 반장과 친해졌다. 몇 번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앉아 함께 식사를 했다. 대개 점심때에는 실비로 공장 식당에서 식사를 사먹었지만 연근이나 야근이 있는 날에는 저녁 식사가 제공되고 밤 열두 시 이후에 야참이 나왔다.

-뭐 좀 읽을 만한 좋은 책 없나?

홍 반장이 불쑥 그렇게 말해서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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