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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신의를 지키며」-이란사태 인질구출(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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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만 이틀 넘게 잠자리에 들지 못한 나는 거의 녹초가 되고 낙심해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한잠도 못 자고 골치만 썩인 때문에 앞일에 대한 밝은 전망은커녕 지난 일 조차 생생히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눈앞의 과제뿐이었다.
이날은 나의 대통령재임 마지막날인 동시에 여러모로 내 임기 중 가장 극적인 시간이었다. 이 순간 미국의 외교와 군사, 그리고 경제의 모든 힘은 한데 집결된 채 내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한편으론 의욕을 자극하면서도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할 터였지만 나 자신 최선의 상태가 못됨을 깨달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목전에 걸려있는 것은 4백44일째 이란에 억류돼있는 52명의 귀한 생명`그리고 1백20억 달러 가까운 미국내의 이란 자산이었다.
이 이틀동안 집무실(오벌 오피스)엔 나 혼자일 때도 있었으나 보통은 비서실장「해밀턴· 조던」과「조디·파월」대변인이 함께 자리를 지켰다. 아내「로절린」은 틈날 때마다 내 곁에 있으면서 거듭 휴식을 권했다.
나는 거의 줄곧 책상 앞에 앉아 일했지만 가끔 덜 바쁠 때면 벽난로 앞 작은 장의자에 드러누워 쉬기도 했다. 이럴 때도 십상팔구 내 곁 방바닥엔 전화통들이 놓여 있곤했다.

<정오 되면 평민신분>
나는 세계 곳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통화했다. 그러면서 얘기할 내용을 혼동하거나 잊지 않도록 자세히 기록해 나갔다. 무엇을 할때건 우리의 눈길은 방문옆 벽에 걸린 커다란 쾌종시계로 자꾸 돌아갔다. 시간, 시간이 문제였다.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미국의 평판과 영향력이 좌우되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또 내가 이 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내린 결점들이 옳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이 위기는 꼭 풀어내고 싶었다.
이처럼 내가 국가에 진 책임은 막중했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얼마 안됐다.
정오가 되면 나는 이미 미국대통령이 아닌 것이다.
1979년11윌4일 테헤란에서 일어난 미국인 인질사건은 나와 모든 미국 민의 삶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대통령이란 공적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뤘지만, 개인적으로도 사무치는 감정을 가슴깊이 안게됐다. 인질들은 때론 내 살붙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의 이름과 경력을 잘 알게 됐고, 이란의 유폐지에서 써보낸 사신들도 읽었다. 인질가족들 중 몇몇과는 아주 가까워졌으며, 워싱턴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는 그들 고향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간절히 나는 인질들이 자유를 되찾기를 바랐다.
인질들을 구하기 위한 나의 마지막 노력은 나흘전인 1월16일 금요일에 시작됐다. 이날 우리와 이란 측은 인질석방에 관한 일반적 조건에 마침내 합의했다. 그러나 그 후 일은 자꾸 늦어지기만 했다.
인질사건이 터진 후 줄곧 겪은 일이지만, 의심 많고 분별 없는 이란사람들과 협상하기란 정말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나를 비롯한 어떤 미국인과도 직접 교섭하지 않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이다.

<정들었던 인질가족>
게다가 우리와 간접적으로나마 협상하고있는 이란 인들은 인질석방을 절대 반대하는 강경파들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고있었다.
우리와 이란사이의 중재역할은「모하메드·벤·야히아」외상이 이끄는 알제리 인들이 맡고 있었다. 폐르시아말을 쓰는 이란 인들은 프랑스 말을 쓰는 알제리 인들을 통해서만 우리와 교섭했다. 따라서 내가 무언가를 묻거나 제안하려면 워싱턴에서 알제를 거쳐 테헤란까지 전달되는 동안 두 번의 번역과정을 거쳐야했다.
저쪽의 대답이나 대응제안이 내게 전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석방을 위한 재정적·정치적 준비사항들은 매우 전문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아주 꼼꼼하게 올 바론 법적 양식에 맞춰 번역돼야했다.
인질사건이 벌어진 열흘 뒤 나는 수 십억 달러 어치의 금과 은행예금 등 미국인의 손안에 있는 모든 이란 자산을 압류했었다. 물론 인질들을 무사히 풀어주기만 하면 언제는 기꺼이 되돌려줄 작정이었다.
이제 이란과의 약속에 따라 압류총액의 3분의2 가량이 미국의 손을 떠나게 된다. 넘겨줄 자산은 연방준비은행과 12개 미국은행의 해외지점들이 관리해온 몫이며, 국내 상업은행들이 갖고있는 나머지 3분의1은 동결은 풀리지만 양국사이의 청구권문제 해결용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지난 14개 윌 동안 우리 금융기관들은 특수상황 속에서나마 각기 맡고있는 막대한 돈을 나름대로 잘 관리해왔다. 그리고 마지막 협상과정에서도 이들 12개 대 은행들은 핵심적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은행들은 이 엄청난 금액의 이전작업이 합법적으로 정확하게 이뤄지게끔 지켜야할 입장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까딱 잘못으로 비싼 댓가를 치르게 되거나 나중에 법정소송에 말려들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 한점의 톨림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알제와 테헤란뿐 아니라 런던·이스탄불·파리·본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주요도시에서 지난 몇 주일 동안이 문제와 관련된 협상이 진행돼 왔었다. 이제 우리 노력의 결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틀전 일요일, 캠프데이비드에 마지막 들렀을 때 나는 자산이전작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15가지의 서류에 서명했다.
알제리 중 재단을 통해 이란과 맺은 협약내용대로, 이란자산 중 미국 쪽에서 합법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배상청구 액을 갚기에 충분한 금액을 조건부양도구좌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줄 것이었다<주=조건부양도구좌(escrow account)혹은 제3자 기탁구좌란 거래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관리하고 있다가 계약조건이 충족되거나 청구권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됐을 때 양수 인에게로 넘겨지는 구좌임>.이 구좌는 중재국인 알제리중앙은행 명의로 영국 중앙은행에 두기로 했다.

<영 중앙 은에 돈 옮겨>
우리가 압류했던 이란의 금은 나흘 전 금요일에 이미 영국중앙은행으로 이전해 놓았다. 주말엔 연방준비은행과 관련 민간은행들로부터 영국중앙은행으로 돈올 보내는 예행연습까지 했다. 절차는 상당히 복잡했지만 연습은 별 실수 없이 끝났다. 재무장관「월리엄·밀러」의 말로는 영국중앙은행 역사상 주말에 일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였다.
틈틈이 나는 대통령당선자인「로널드·레이건」과 인질가족들에게 일의 진전상황을 알려주었다. 또「마거리트·대처」영국수상과는 자산이전의 세부사항들을 의논하는 한편 인질들이 풀려난 후 처음 기착할 서독의「헬무트·슈미트」수상과도 연락해 영접채비를 마무리지었다. 인질들은 이란에서 풀려나면 곧장 서독 비스바덴에 있는 미군병원으로 옮겨 치료받고 며칠 쉰 후 정상생활로 되돌아가도록 결정돼있었다.<무단전재·출판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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