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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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그는 시키지 않은 말까지 계속했다.

-선생이야 유명한 사람이니까 그동안 내가 소식은 알구 있었지. 참 당신두 시끄러운 인생을 살았지만, 대단한 사람이오. 그 짓을 평생 한단 말이오?

- 그럼 어떻게 해, 배운 도둑질이 그건데.

오고 가는 얘기를 내 아이들은 침묵한 채로 신기하다는 듯이 옆에서 엿들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물론 택시 요금은 콜 비용까지 정확하게 받고 나서 그가 말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당신 노조 맹근다구 할 때에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허우. 하지만 돌이켜 보란 말요. 우리 같은 사람 그런 어지러운 시국에 그래두 밥 먹구 여기까지 살아왔잖아! 내가 신고한 건 정말 미안해, 이해하구료.

- 아니, 아니 당신 말이 맞어.

차에서 내린 다음에 나는 복잡한 네거리의 신호등 앞을 쏜살같이 달려 사라지는 그의 택시 꽁무니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래 당신 말이 맞다. 또한 지금 당신의 사과는 뒤늦었지만 내가 받을 만하다. 그래도 내 뒤통수를 치는 것은 그의 사과를 받을 만큼 내 인생이 정직하고 떳떳했는가를 묻고 싶었다. 작가로서가 아니라 세상살이에 부대끼며 살아온 동시대 사람으로서.

그의 소개로 한창 번성 중에 있는 어느 광학회사의 연마부에 취직했다. 물론 자필 이력서와 병력증명, 그리고 고교 졸업증명서 등이었다. 내가 만일 먼저 다녔던 명문고를 제대로 나왔다면 나는 면접에서 즉시 탄로가 났을 터였다. 어느 공고의 야간부 토목과를 나온 졸업증명서를 보고는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연마부는 대강 세 가지의 작업조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그랗게 자른 유리를 맨 처음에 초벌 갈아내는 작업조가 있고 두 번째 정밀하게 티없이 광을 내는 작업조가 있으며 연마틀에 렌즈가 될 유리를 붙이는 작업조가 있었다. 연마틀은 둥근 목형 위에 콜타르를 바른 것인데 열을 가해서 표면이 눅진해지면 빙 돌아가면서 렌즈를 붙이고 찬물에 담가서 굳혔다. 이 틀을 차례로 빙빙 돌아가는 기계에 끼우고 한 단계씩 옮겨 준다. 맨 처음에 끼웠던 틀이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면 이것이 초벌 연마가 끝난 렌즈들이었다. 빼어서 작업대에 쌓아 두는데 이들을 모아다가 두 번째의 공정에서 다시 갈아낸다. 내가 맡은 일이 초벌 작업대였다. 물론 견습이라 숙련공의 보조 노릇부터 시작했다. 숙련공은 몸집이 똥똥하고 여드름 많고 눈이 작은 청년이었는데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훈아와 남진의 노래를 작업 도중 내내 입에 달고 살았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오오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또 돌아보며

서울로오 떠나가안 사람

하도 구성지게 넘어가기에 나중에 야근 끝나고 일당 받은 날, 선술집에서 소주 마시다가 한번 불러보랬더니 질겁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절대로 노래를 못 부른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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