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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된 박 대통령 공약, 특별감찰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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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분명히 법률로 존재를 규정했다. 그런데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에 그런 법률이 정한 ‘유령’이 있다. ‘특별감찰관’이 그 유령이다. 특별감찰관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2012년 8월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수락연설의 주요한 지점에 특별감찰관을 넣어 “저와 제 주변부터 더욱 엄격하게 다스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임기 첫해를 그냥 지나보냈다. 만시지탄인 감은 있으나 지난 2월 법률로 태어났다. ‘법률 제12422호’로, 버젓이 등록번호까지 달았다. 대통령의 4촌 이내 친인척, 청와대 수석비서관 이상의 비위를 단속하는게 임무다. 시행은 6월 19일부터 하도록 돼 있었다. 정상적으로라면 지금쯤 국회가 추천한 후보자를 대통령이 임명해 인사청문회를 마쳤어야 했다.

 하지만 부재중이다. 여야 합의로 구성한 추천위원회가 지난 7월 11일 3명의 후보자까지 발표했는데도 말이다. 민변 부회장 민경한 변호사,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장을 지낸 임수빈 변호사, 법무부 보호과장과 서울남부지검 차장을 지낸 조균석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등 세 명이 초대 특별감찰관 후보다. 법률이 존재하고, 시킬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특별검찰관은 어디로 실종된 걸까.

 공식 발표까지 해놓고 5개월째 임명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데는 코미디 같은 사연이 있다. 세 사람 중 조균석 교수가 후보직을 고사한 게 발단이었다. 조 교수는 여당이 추천한 인사였다. 새누리당은 후보자 재선정을 요구했다. 민경한 변호사는 민변 출신이니 뒷골이 아프고, 임 변호사는 검사 시절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보도한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기소가 무리라는 의견을 냈던 인물이라 코드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야당이 들어주겠는가. 조 교수가 고사한 게 자기들 잘못도 아닌데. 당연히 ‘낙장불입’이라 튕겼다.

 문제는 새누리당이 조 교수 말고 추천할 인물을 고르지 못한 데 있다. 지원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해는 간다. 특별감찰관은 일을 잘하면 ‘권력’에 욕먹고, 일을 못하면 ‘보통감찰관’만도 못하다고 여론의 손가락질 받을 자리다. 과연 여당 입맛에 맞는 인사 가운데 박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같은 인사들이 비위를 저지르는지 아닌지 체크하고 다니고 싶은 사람을 구하기 쉬울까. 그게 특별감찰관 실종 사태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야당이 추천한 인사들이라도 낙점하는 게 정도다. 그게 “친인척과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특별감찰관제를 도입해 사전에 강력하게 예방하겠습니다”(2012년 8월 대선후보 수락연설)라고 했던 박 대통령의 다짐과도 맞다.

 지금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이 작성한 감찰 문건 하나가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다.

 고(故) 최태민 목사의 사위 정윤회씨가 청와대 내 십상시(十常侍)그룹과 결탁해 김기춘 비서실장을 몰아내려 한다는 문건 내용은 충격적이다. 청와대는 증권가 정보지, 즉 ‘찌라시’에나 나올 법한 얘기라고 한다. 문제는 ‘증권가 찌라시’가 아니라 ‘청와대 찌라시’라는 데 있다. 청와대가 문건을 첫 보도한 세계일보를 검찰에 고소하는 강력 대응에 나선 건 아마 문건 내용이 허위라는 자신감에서 ‘찌라시성’을 입증하겠다는 뜻일 거다. 문건 내용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문제가 가시는 걸까. 왜 권력기구에서 ‘찌라시’를 만들었으며, 청와대 바깥으로 누가 왜 유출했는지, 그 과정에 권력심층부에 있는 사람들끼리 파워게임은 없었는지 의문투성이다.

 ‘특별감찰관 실종 사태’엔 애초 공약을 하곤 제대로 챙기지 않은 박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 혹시 존재를 잊고 있었던 건 아닌지. 대형 권력 스캔들은 한 번 불거지면 통제 불능이다. 사전에 예방주사를 세게 놓는 길 밖에 없다. 만약 특별감찰관이 있었다면 ‘찌라시’파문이 있었을까. 특별감찰관의 부재중에 존재감을 역설적으로 더욱 크게 느낀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