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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30 일터에서

내 한마디에 주가가 춤추니 밤샘 찌든 온몸엔 전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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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내가 낸 보고서 한 장이 세계 경제를 들었다 놓았다. "이 주식에 베팅하라" "팔아라! 희망이 없다"는 내 목소리를 따라 전 세계 주식시장이 요동쳤다. 그러나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오늘도 새벽같이 회사로 달려나가야 한다. 자본시장의 첨병? 고액연봉의 화려한 전문직? 밖에서 보기에 애널리스트는 무척이나 그럴싸한 직업이다. 보고서가 적중하면 보람도 크다. 그러나 고달프기 짝이 없는 생활이기도 하다. 머리에서는 쥐가 난다.

입사 경쟁률을 보면 애널리스트가 여전히 선망의 대상인 모양이다. 하긴 매출이 수조원에 이르는 기업들의 적정 주식가격이 내 손에서 결정되고, 나이 차가 스무 살은 더 될 기업 임원들과 한자리에 앉아 회사 전망에 대해 논하며, 나의 한마디가 대단한 권위를 갖는 것처럼 매스컴에 인용되곤 하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입문 6년차인 나의 결론은 매력적인 직업이긴 하지만 별 생각 없이 동경할 만큼 화려한 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펜대 굴리며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기면 오산이다. 좋은 머리에 앞서 부지런함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새벽잠이 없어야 한다. 애널리스트의 하루는 꼭두새벽인 오전 7시부터 시작된다.

전날 미국시장 소식과 밤 사이 나온 뉴스들을 체크하면 법인 영업부와의 아침 회의가 기다린다. 고개가 무겁고 졸리더라도 이때 특히 조심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히면 그 자리에서 박살나기 십상이다. 회의가 끝나는 오전 9시, 주식시장이 열리면 본격적인 하루 업무가 시작된다.

애널리스트의 핵심 업무는 기업의 적정 주가를 산정하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것이다. 사전에 기업들의 사업보고서와 모든 공시를 샅샅이 살펴보고 각종 자료더미를 뒤져야 한다. 직접 발품을 파는 기업탐방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보고서 작성은 잠깐이다. 이런 사전조사를 하는 데 드는 시간이 수십 배 더 길다.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고객들이 넙죽 받아가는 게 아니다. 손수 마케팅 잡일까지 도맡아야 한다. 펀드 매니저들에게 내가 추천한 종목을 사게 하고 내 이름을 뚜렷이 각인시키려면 발로 뛰어야 한다. 수시로 찾아가고 e-메일을 보내고 전화통에 매달려야 한다. 꾀꼬리 같았던 내 소프라노 목청이 지금은 둔탁한 알토로 변질된 것도 직업병의 하나다.

어둠이 내린다고 칼퇴근은 꿈꾸기 어렵다. 여의도 금융가에 불이 밤새 켜져 있는 것은 그냥 겉멋이 아니다. 밤 10시쯤 애널리스트들에게 전화해 보면 백이면 백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다. 본격적인 리포트 작업을 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애널리스트가 몸으로 때우면 되는 직업도 아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모든 애널리스트들은 1년에 두 번, 주요 언론사가 주최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 투표에 온 신경이 곤두선다. 흔히 스타급 애널리스트라는 고액연봉자들은 이 투표에서 상위에 오른 사람들이다. 이 성적표에 따라 다음해 월급봉투의 두께가 달라지고, 심하면 두말 않고 보따리를 싸야 하는 게 애널리스트의 운명이다. 대학 졸업까지 16년 동안 짓눌려 온 기말고사의 부담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다.

▶ 윤성혜 (35·우리은행 신탁사업단 과장)

애널리스트의 근무환경은 밖에서 보면 화려할 뿐이다. TV 드라마에서도 화이트칼라의 대표 직종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막노동 쪽에 가깝다. 지금 야근 중 짬을 내 글을 쓰는 나의 옷차림도 운동복 윗도리에 반바지 차림이다. 편한 근무를 위해 항상 이렇게 옷을 싸 간다. 그래도 귀신조차 모른다는 주가는 맞히기 어렵다. 문득문득 점쟁이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동안 배운 수많은 주식 분석 이론은 단지 참고사항에 불과할 뿐 정답은 없다. 혹시나 저평가돼 있다고 매수 추천했는데 주가가 빠지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차라리 사주라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참담한 기분이 든다. 언론에서 "무책임한 애널리스트가 엉뚱한 투자의견을 내놔 시장을 흐린다"며 두들기고, 일부 열성 투자자들은 사무실로 전화해 욕을 바가지로 퍼붓기 일쑤다.

그렇다고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내가 이 자리에 여전히 눌러앉아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장점도 많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애널리스트 개인이 자기 보고서에 전적인 책임을 지는 만큼 회사도 후한 자율권을 준다. 회사의 부속품이 아니라 내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특히 내가 발굴한 기업의 주가가 승승장구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의 희열을 느낀다. 애널리스트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일종의 마약과 다름없다. 지금 새벽 1시, 사무실 책상에 코를 박고 있는 내 모습이 창가에 비친다. 아직은 그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윤성혜 (35·우리은행 신탁사업단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