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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청 '핵폭풍'] 국정원, 2000여 개 원본 진짜 없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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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미림팀장 공운영씨 집에서 도청 테이프 274개가 발견되면서 정국은 고비를 맞았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려면 아직 풀어야 할 의문점은 남아 있다.

◆ 테이프 원본 국정원에 없나=우선 미림팀이 제작한 테이프의 수량과 행방이다. 공씨 및 주변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1994~97년에 제작한 테이프는 2000~3000여 개. 일각에선 8000개라는 설도 있다. 검찰이 압수한 274개의 최소한 10배 분량이다. 국정원은 지금까지 이들 원본 테이프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밝힌 적이 없다.

상식적으로 보면 테이프 원본은 당연히 국정원에 있어야 한다. 불법성 여부를 떠나 미림팀 작업은 국정원이라는 조직과 지휘계통 내에서 이뤄졌다. 공씨가 도청 내용을 오정소 대공정책실장 등에게 보고하면 오 실장은 이를 토대로 청와대 등 상부에 동향 보고서를 보내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그 근거가 되는 테이프는 내부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상식이다. 그래야 공씨 등이 보고서를 멋대로 쓰지 않았음을 나중에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정원 측은 "국정원이 별도 보관 중인 테이프는 전혀 없다"며 "이번에 문제가 된 테이프가 우리 쪽에서 흘러나간 것인지 확인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다"고 말한다. 한 관계자는 "미림 작업은 극비리에 이뤄졌기 때문에 통상적인 문서처리 프로세스대로 처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 성공한 거래는 없을까=공씨와 재미동포 박인회(구속)씨가 단 한 차례만 거래를 시도했을까도 의문이다. 공씨 테이프엔 정.관계와 재계, 언론계 고위층의 은밀한 대화가 담겨 있다. 과연 이런 '물건'을 수백 개 확보한 이들이 삼성과만 거래하려 했을 것인가는 의문이다. 박씨의 구속영장엔 "삼성측에 5억원을 요구했다"고 돼있다.

따라서 ▶공씨가 다른 대기업 최고위층과 정계 인사의 대화록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고▶이를 거래하려 했을 수도 있으며▶이 같은 거래가 성사되고 해당 테이프는 어둠 속에 묻혀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삼성 이외에 다른 기업.관련자들을 협박했거나 거래를 시도했는지도 밝혀져야 할 대목이며 검찰의 몫이다.

◆ 시중에 더 이상 도청 테이프는 없나=공씨는 꾸준히 테이프를 복사해 왔다. 우선 자신이 들고 나온 테이프가 복사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재미동포 박씨 등에게 넘겨준 것은 자신이 보관 중인 것을 재복사한 테이프다. 국정원에 반납한 테이프도 물론 복사본이었다는 것이 이번에 확인됐다. 그래서 분당 공씨의 집에서 압수한 테이프가 마지막 테이프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공씨가 별도로 보관 중인 테이프가 더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검찰이 확인할 부분이다. 압수수색을 당할 게 뻔한 상황에서 공씨가 테이프를 집에 방치해 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공운영 같은 '프로'가 자료를 모두 검찰에 헌납했을 리 없다"고 말했다. 274개 이외에 뇌관은 따로 있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또 이번에 압수한 테이프와 99년 이건모 당시 국정원 감찰실장이 소각했다는 테이프가 같은 것인지도 확인해 봐야 할 사항이다. 이 전 실장은 '99년 12월 제 앞에서 보안과 P팀장과 직원으로 하여금 목록과 테이프를 일일이 확인토록 한 뒤 소각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당시 작성했던 리스트와 이번에 압수한 테이프 리스트를 대조해 봐야 한다.

이 밖에 부분적으로 유출된 것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천용택 전 국정원장이나 박지원 전 장관, 그에 앞서 YS정부의 실세들이 보고서와 함께 테이프를 건네받아 보관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전화도청 자료는 어떻게 처리했나=국정원은 과거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전화도청을 했다. 안기부와 국정원 초기엔 과학보안국이라는 도청조직이 운용됐다. 이 조직엔 수백 명이 수천 회선의 전화선을 이용해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전화를 무차별 도청했다. 과학보안국도 녹음한 전화통화 내용을 녹취록으로 풀어 위에 보고했다는 것이 퇴직한 요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전화도청 자료는 어떻게 처리됐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이정민.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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