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는 은행 업무 확대 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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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금융 정상화 작업과 관련하여 금융 제도의 개선책이 다각도로 연구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금융 산업 심의회가 얼마전 시중 은행에 외부 인사로 구성된 별도의 이사회를 두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는가 하면 최근엔 은행도 보험·증권·리스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업무 영역을 확대토록 허용하자는 구상도 나왔다.
전자는 미국식의 은행 경영 방식을, 후자는 구주 대륙식의 그것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 변경은 앞으로 실명 거래제에 따른 은행법 개정이 있을 것이므로 그 기회에 여러 가지 방안을 반영하자는 활발한 움직임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현행 금융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니므로 그 개선책을 논의한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선진권의 금융 제도라고 해서 우리의 금융 제도에 그대로 원용하는 것이 적절한 가에는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어떠한 산업 구조나 기업 조직이나 간에 그 나라의 경제 여건에 적응토록 생성되어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행에 외부 인사로 구성된 이사회를 두어 경영층의 자의적인 경영을 막자는 방안을 굳이 은행법에 규정한다는데는 찬성할 수가 없다.
금융의 자율화를 추구한다면, 각 은행의 경영 방식은 그들에게 일임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별도의 이사회를 두든, 현행대로 임원이 참여한 이사회 두든 은행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기도록 신축성을 두는 것이 오히려 좋다.
은행의 업무 영역을 확대하자는 제의는 현실적으로 은행이 그러한 업무를 해나갈 조직과 인력을 확보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덮어두고라도 근본적으로 그 발상 자체를 재검토할 여지가 있다.
구미에서의 은행 발달 과정을 열거해보고 그 타당성 여부를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미계의 은행은 산업 혁명을 이끌어낸 상업 금융의 확대를 배경으로 발달해 왔다.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 산업 혁명과 함께 대량 유통이 늘어나자 화폐 출납, 유통의 원활화뿐만 아니라 신용 조작이라는 적극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상업 금융의 성격을 뚜렷이 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반세기나 산업 혁명에 뒤늦은 구주 대륙에서는 이를 따라잡기 위해 중공업 투자에 소요되는 자금을 은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불독의 은행들은 증권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장기 신용을 제공하는 등 중요 산업에 깊숙이 개입했다. 산업 은행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졌었다.
당초 독일의 은행들은 영국의 예금 은행과 달리 증권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에 증권 은행 (Effekten bank) 또는 투기 은행 (Spekulatio-ns bank)으로 출발했고, 19세기 후반부터 예금 은행을 겸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진국의 은행사를 살펴보면 우리의 은행 업무 확대 주장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업 금융 내지는 예금 은행에 대해 정반대로 산업 금융을 접목시키는 역순을 밟자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산업 자본의 금융 예속화를 하자는 의도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은행의 업무 영역 확대가 기존 금융업의 활동 범위를 위축시킨다는 논리에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산업 발전 단계, 또는 금융 시장의 현황에 비추어 구주 대륙의 초기 산업 자본화단계를 연상하는 것이 타당하냐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선 상업 금융과 장기 산업 금융의 구분이 어려울 만큼 현대의 경제 구조가 복잡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금융 제도가 지향해야 할 것은 정책 금융과 상업 금융의 구획 정리에 있을 것이다.
시은의 민영화를 계기로 시은은 상업 금융에 충실하고 정책 금융은 국책 은행이 담당하여 자원 동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본령이 아닌가.
시은의 민영화가 뜻하는 것은, 독자적인 경영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시은도 사실상 정부의 소유에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업무 영역을 넓혔다해서 신규 사업에 실패할 경우, 이제까지 반석처럼 믿어온 은행이 도산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다.
더우기 은행법 개정안은 대주주의 소유권을 10%로 제한하고 있어 시은은 무주물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은행이 무모한 사업 확장을 한다면 예금주는 누구를 믿고 저축을 해야 할 것인가.
은행 업무 확대 안은 부질없는 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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