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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청, 테이프 유출 어떻게 이뤄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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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불법 도청과 도청 테이프 불법 유출이 낳은 파문의 시작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였다.

안기부의 비선조직인 미림팀이 한정식집과 호텔 식당 등 정.관계, 언론계 고위인사들이 만나는 곳에서 무차별로 불법 도청을 하면서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개 불법 도청은 예약명단을 확인해 도청기를 미리 설치한 해당 음식점의 옆방에서 미림팀 요원들이 듣는 식이었다. 이를 안기부 사무실에 가져와 녹취록으로 풀어 미림팀의 공모 팀장이 당시 오모 대공정책실장에게 보고하는 수순이었다.

보고방식은 보안을 위해 프린트(출고)가 금지된 컴퓨터 온라인망을 이용해 오 실장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주로 오 실장의 보좌관인 김기삼씨가 보고된 컴퓨터 화면을 열어보고 필사해 오 실장에게 건네주는 형식이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당시 관계자들은 "미림팀의 존재는 전해들었지만 식당 종업원을 통해 첩보를 입수하는 차원인 줄 알았지 이렇게 무차별로 불법 도청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99년 미림팀의 공 팀장이 해직을 당했다. 당시 공 팀장은 도청한 테이프 중 200여 개(녹취록 포함)를 보따리에 싸서 들고나갔다. 해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공 팀장은 국정원 해직자들의 모임인 '국사모(국가사랑모임)'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종종 "나를 건드리면 안 될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게 있다"고 주변에 말을 했었다고 다수의 정부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를 들은 한 국사모 주변인물이 일종의 정보 브로커로 추정되는 재미교포를 공 팀장에게 소개했다. 공 팀장은 자신이 갖고 있던 도청 테이프 중 4개를 골라 이 재미교포에게 '맛보기'로 건네줬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들은 "공 팀장이 해직 때 갖고 나간 200여 개의 테이프 중 왜 유독 특정 언론사 사장과 특정 기업 관계자들의 대화내용을 도청했다는 테이프만 유출돼 돌아다니고 보도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중 한 관계자는 "미림팀은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은 물론 유력 언론사 사주 등 최고위층은 모두 도청했을 것이란 판단을 갖고 있다"며 "모 언론사 사주는 특히 한정식집을 자주 이용해 더욱 집중 표적이 됐다"고 23일 말했다.

이 문제의 재미교포는 공 팀장에게서 건네받은 4개의 테이프를 들고 삼성 측과 접촉했다. 그는 6억원을 요구했으나 삼성은 이를 거절하고, 국정원에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삼성의 신고를 받은 천용택 원장 체제의 국정원은 즉각 공 팀장으로부터 갖고 나간 테이프와 녹취록을 압수했다고 한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그러나 공 팀장은 이에 앞서 미리 테이프와 녹취록의 복사본을 모처에 숨겨 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를 근거로 자신에 대한 사법처리를 막기 위한 용도로 이용했다. 정부 관계자는 "당시는 공 팀장이 '불법 도청'사실을 작심하고 폭로할까봐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테이프만 회수하고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현재 국정원 내부에는 이와 관련된 테이프나 녹취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천 원장 측이 회수한 테이프와 녹취록을 폐기했는지, 별도로 외부에 보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진실은 천 원장 등 당시 국정원 수뇌부와 공 팀장 등 일부만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올해 초 MBC 이상호 기자가 문제의 재미교포 브로커를 수소문 끝에 찾아갔다. 이 재미교포가 이 기자에게 불법 도청 테이프를 건넨 것이라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공 팀장→재미교포 브로커→MBC 이상호 기자→MBC로의 유통 과정을 거친 셈이다.

'이상호 X파일'로 불리는 비밀문건은 네 가지 내용물로 이뤄져 있다. 한 대기업 간부와 일간지 사주와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1시간30분 분량의 테이프와 97년 4월과 9월, 10월에 작성된 안기부 내부 문건이다. 물론 안기부가 비밀 도청조직 미림팀의 도청 내용을 풀어 만든 것이다.

그럼 입수과정에 대한 이상호 기자의 설명은 어떨까. 이 기자는 "지난해 10월 삼성 비자금 건인데 보도할 자신이 있느냐는 제보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전화가 취재의 단초가 됐다는 것이다. 이어 자신이 속해 있던 보도기획 프로그램팀의 간부와 협의해 본격적인 취재에 나섰다. 그는 미국을 두 차례 오간 끝에 올 1월 초 그곳에서 녹음 테이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정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 "불법 유출과정에서 해당 기자가 이 재미교포 브로커에게 자신의 돈 1600만원을 주고 도청 테이프를 구입했다는 첩보가 있다"며 "추후 유출 조사가 본격화될 경우 해당 기자에게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 요청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자는 그러나 24일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라며 "혹시 몰라 1000만원을 준비했으나 건네지 않았다. 순수하게 공익 차원에서 이뤄진 제보"라고 주장했다.

은밀하게 진행되던 취재는 엉뚱한 데서 그 베일의 일단이 벗겨졌다. 이상호 기자가 지난해 말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고발기사를 썼던 회사(SBS 대주주인 태영)사장으로부터 선배 두 명과 함께 100만원 상당의 명품 가방을 선물받았다가 돌려줬다"고 밝혀 파문이 인 것이다.

그런데 글 말미에 뜬금없는 얘기가 등장한다. "이제 두 시간 후면 미국으로 출장을 떠난다. 지금껏 핸드백에 관한 이야기를 적는 것도 출장의 성격 때문이다. 이번 출장은 자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수반하는 일이다…." 이후 언론계에선 '이상호 X파일'에 관한 얘기가 떠돌아다녔다. 언론비평지 미디어오늘과 일부 인터넷 언론이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기자로부터 이 테이프를 건네받은 MBC는 확보한 증거만으로 보도는 어렵다는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었다. 통신비밀보호법이란 실정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보도할 가치는 없다고 본 것이다. MBC의 한 간부는 "당시 상태로는 보도할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쪽이 대세였다"고 말했다.

최훈.이영종.이상복.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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