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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거진 안기부 불법도청] 노대통령 유세 때 "나도 당한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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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1997년 대선 당시 불법 도청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보기관의 불법 도청 문제가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군사정권 시절뿐 아니라 '문민정부'를 표방하던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국가 정보기관에 의한 도청이 버젓이 행해졌다는 점 때문이다. 혹시 지금도 누군가 나를 몰래 엿보거나 대화.통화내용을 엿듣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사회 지도층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 대상 가리지 않는 무차별 도청=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12월 대선 유세 때 "나도 도청을 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광범위하게 정보기관의 도.감청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국가정보기관에 의한 조직적인 불법 도청 사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99년 이부영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의 발언에서다. 그는 "국가정보원 과학보안국에서 300여 명의 인원이 4교대로 365일 도.감청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당시 국정원은 이씨를 고소했다. 혐의는 '공무상 기밀누설'. 이로 인해 국정원 도청 조직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이번에 문제가 된 미림팀 도청사건의 경우 안기부 내 비선조직 성격의 요원들이 직접 주요 인사의 접촉장소를 찾아다니며 불법 도청을 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공식라인을 통한 내부의 감청 시스템을 벗어난 행태다. 심부름센터 수준의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얘기다.

전화 도.감청의 경우도 문제는 심각하다. 국정원과 기무사 등 정보기관의 요구에 따라 한국통신 등 통신사는 회선을 제공해 준다. 감청하려는 전화번호의 통화회선을 직접 정보기관의 전용회선에 연결해 주면 이를 감청요원들이 녹취하는 형태다. 각 전화국의 교환기에 직접 선을 꽂아 들을 수도 있다. 전화고장을 시험하는 장치를 이용해서도 가능하다. 법원의 감청 영장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수사 편의 등을 이유로 막무가내 도.감청을 하려는 경우도 있다는 게 통신회사 관계자의 귀띔이다. 정보기관은 이 과정에서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과거 통신회사 내에 협조세력을 비밀리에 관리했다는 게 정설이다.

◆ 떨치기 힘든 도청의 유혹=고영구 국정원장은 2003년 4월 "국정원이 도청을 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제 양심을 걸고 선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번처럼 과거 정권의 도청 사례만으로도 정보기관은 국민으로부터 의혹의 눈총을 받게 된다.

정보기관이 불법 도청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적은 비용으로 가치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22일 "수백 명의 I. O.(정보수집요원)를 투입해도 얻기 힘든 민감한 고급 정보를 숨소리 하나 빠뜨리지 않은 채 고스란히 챙길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보기관 책임자나 최고 권력자가 정적이나 유력인사의 사생활을 엿본다는 짜릿한 쾌감을 한번 느끼면 좀체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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