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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변화하고 있다…|당직개편 후의 민정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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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구개편도 없고 인사이동도 없다』 『민정당은 공조직이기 때문에 몇몇 간부가 바뀐다고 달라지지는 않는다.』
당직개편 이후 민정당간부들은 이처럼 힘주어 「무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강조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뭔가 변화가 임박했기에, 또는 변화가 불가피하기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든다.
사실 당직개편 이후 스스로는 부인하고 있지만 민정당이 달라지리라는 시사와 추측은 당 안팎에 널리 깔려있다.
아무리 공조직이고 변화 방침이 없다 하더라도 사람이 바뀌면 달라지는게 있을 것은 뻔한 이치. 간부 서로간의 인간관계가 달라지고 당과 정부와의 협의 양상도 전과 같을 수만은 없다. 사람간에는 친소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바뀌면 문제를 연락하고 의논하는 상대도 달라지게 마련이며, 일이 다른 사람들간에 주로 논의되면 그 일의 처리방법이나 결론 역시 달라진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일처리의 중요한 한 본질이 바뀌는 것을 뜻하며 일을 처리하는 「권」이 바뀐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간부들의 거듭된 부인과는 달리 민정당은 당직개편과 함께 이미 변화의 기점에 섰고 그렇지 않다면 개편자체가 아무런 뜻이 없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민정당은 어떻게 변할까. 변화의 방향에 대해 당 안팎에 널리 걸린 기대의 하나는 당내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것이다.
당의사의 결정과정에서 지난날 많은 소속의원들이 소외된 것은 사실이다.
민정당이 창당 초부터 각계각층의 유능한 인물들을 다양하게 포용하고 있음을 자랑으로 내세웠지만 다양한 인물은 있어도 다양한 의견은 별로 없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 당의사는 대개 핵심간부들이 유관요로와 협의·결정하는 과두적 운영체제였던 만큼 다양한 의견은 있더라도 공식화하지는 못한 채 잠재상태거나 사견에 머물러있었다.
출구가 없는「의견」들이 소외감을 느낄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이 더러는 잠재적인 불평·불만화할 우려 역시 없지 않았다. 간부들은 이를 막고자 회식·골프모임과 간담회 등을 통해 의견을 듣고 관심을 표해주는 등 여러모로 애를 썼으나 그것은 그때 뿐으로 「의견」이 기능적으로, 제도적으로 반영이 보장되지 않는 한 해결될리 없는 문제였다.
이처럼 당내민주주의의 문제는 그동안 민정당의 숨은 고민의 하나였으며 최근 당직개편과 장 여인사건 등으로 시국의 수위가 오르면서 이 문제는 급기야 표면으로 분출되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신임 권익현 사무총장의 취임일이 『당내 민주주의의 활성화』였으며 다른 고위간부들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당무의 분업화』니 『당의 3권분립』이란 말이 나왔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당헌도 고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가 쑥 들어갔다.
요컨대 일원적으로 통합된 임무(권한)를 다원적으로 분산시킨다는 것이 개편후의 민정당이 보인 변화의 방향이었다.
그러자 곧이어 『변화는 없다』는 얘기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말은 액면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조직의 동요를 막고 당원의 사기를 고려한 다분히 현실의 필요성 때문에 나온 말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28일에 열린 의원총회에서 변화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명을 따른다는 「미덕」을 오랫동안 지켜오던 소속의원들이 최근의 시국문제에 관해 이례적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당의사결정에 자기들도 참여해야 한다는 주목할만한 주장을 전개한 것이다. 야당이 국회에 낸 장관해임안 부결이란 당방침에 대해 『그것은 이미 결정된 방침인가, 여기서 논의해 결점하자는 말인가』는 질문이 나왔고 당총재인 대통령이 단행한 개각에 대해서도 다분히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런 현상은 물론 장 여인사건 등으로 높아진 시국수위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의원들도 점차 높아지는 수위에 불안을 느끼고 뭔가 대책을 가져야 한다는 절실한 느낌을 갖고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발언자의 대부분이 국민들과 피부로 접촉하는 지역구출신이란 점도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날의 의원총회는 분명히 당내 민주주의의 한 전례가 된 셈이다. 한번 열린 문을 도로 닫기는 힘들다.
이것은 민정당 자신을 위해서나 정국을 위해 진일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정당의 당내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야당처럼 공공연히 당지도부를 비판하고 회의를 열기만 하면 신랄한 발언이 오가는 풍토까지 갈 것인가.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인 총재중심제의 여당은 당내민주상의보다는 「기율」이 중지되게 마련이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정치적 불이익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장차 있을 선거 때의 공천문제를 생각하거나 당장 현실적으로 국회활동·선거구문제 등 무엇하나 당의 지원 없이 될 일이라곤 없다. 따라서 의원들이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뭔가 목 밑까지 차있는 것을 자제해가며 털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분위기가 여간 풀리지 않는 한, 의원들의 느낌이 여간 절실하지 않는 한 의원들은 여전히 지도부의 결점을 충실히 따를 것이다.
결국 민정당의 당내 민주주의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말해도 무방한, 말해도 크게 장관 없는 범위 안에서 주로 말이 나올 것이다. 그 범위가 앞으로 얼마나 넓어질지는 두고 볼 수밖에 없지만 급격한 활성화는 오히려 뜻하지 아니한 위축을 불러올 소지가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민정당의 새 간부 중은 다분히 요식적이었던 각종 회의체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편 후의 민정당에 또 한가지 주목하고 싶은 점은 국민의 애정 또는 신뢰를 받기 위한 몸부림 같은게 있을 법하다는 것이다. 장 여인사건과의 관련설로 홍역을 치르면서 『당은 결백한데 그 결백을 국민이 믿어주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는 이재형 대표의원의 술회나 『반대세력의 논리는 먹혀들고 집권세력의 논리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의원총회발언은 최근 시국에서 민정당이 안고있는 고민이 뭣 인가를 극명하게 보여둔다.
그토록 부인하고 해명을 했는데도 왜 설은 그렇게 무성하고 여론의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는가. 이번 과정에서 민정당은 이점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못 느꼈다면 시련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 된다.
애정이나 신뢰와 같은 문제는 당세나 조직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정당인 이상 정치로 그것을 획득해야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껏 민정당은 정치를 별로 즐겨하지 않은 것 같다. 야당이 국회에서 「정치공세」를 한다고 못마땅해했고 가급적 국회나 정치의 과정 없이 넘어갔으면 하는 체질도 보여왔다. 정치보다는 조직과 당원교육에 더 열성을 쏟았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내문제일 뿐 국민을 대변하고, 설득하고, 이해를 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는 아니다. 국회에서 야당을 잠잠하게 하는 것으로 민정당의 정치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한다.
애정과 신뢰를 얻기 위한 민정당의 구체적인 복안이나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으나 개편후의 민정당의 최대과제가 여기에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또 이 문제가 실은 당내 민주주의 문제와도 깊이 얽혀있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송진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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