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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럽게 대하라…그것이 이기는 길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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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몇년전 자료수집을 위해 일본에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마침 그곳에 온 우리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일본학생들과 만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주라는 요청을 받고 대충 다음과 같은 말을 해준 일이 있다. 『한국 지식인들이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은연중에 그들이 우리에게 진 역사적인 빚, 예를 들면 일본고대문명의 대부분이 우리에게서 배운 것이라든가 임진왜란이나 한일합방을 통하여 그들이 우리를 침략하였다는 사실 등을 바닥에 깔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것이 싫다.
그들이 빚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바닥에 깔아야만 비로소 대등한 처지에서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싫고, 식민시대를 산 우리 선인들이 절치 부심 하면서 옛날에는 우리가 선진민족이었다고 강조하며 자위하던 일을 우리도 따르는 것 같아서 싫다.
여러분은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에서 태어난 한 나라의 당당한 대학생들이다.
묵은 빚을 들추어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들과 겨룰 수 있으며 또 앞설 수도 있다. 조상의 묵은 빚이나 받으러 다니는 젊은이가 되지 말라. 빚은 마음속에만 치부해 두고 너그럽게 대하라. 대인답게 대하라.』
역시 일본에서의 일이다. 재일 동포 2,3세 젊은이들이『1세들은 일본인을 미워하는 것이 곧 민족의식을 강하게 하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우리는 그들만큼은 일본인을 미워할 수 없다. 민족의식이 약한 탓이란 말인가』하고 심각하게 물어 왔을 때 이렇게 타일러 준 일이 있다.
『1세와 2세, 3세가 모두 일본에 살고 있지만 1세들은 식민지백성으로 끌려 왔고 2세나 3세는 재일 동포로 태어난 점에 큰 차이가 있다. 1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서 뼈에 사무친 설움을 안고 살아왔으며 그 때문에 증오심이 곧 자신을 지탱해 온 지주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증오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그들은 아직 식민지 백성의 처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여러분 2세, 3세들은 당연히 식민지 백성이 아닌 일본 안의 외국인이 되어야 하며, 외국인이 되기 위해서는 증오심이 아닌 민족적 자존심을 키워야 한다. 식민지 백성이었던 1세의 민족의식이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유지되었다면 재일 동포로서의 2세나 3세의 민족의식은 민족적 자존심을 키움으로써만 확고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에 가 있으면서 처음으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 역사, 특히 근대사를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얻은 하나의 소견이며 따라서 그전에도 다음과 같은 뜻의 글을 쓴 일이 있다.
『국사학은 식민지화의 주된 원인을 일본의 침략행위에서 찾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 민족의 역사가 실패한 주된 원인을 민족 내부에서가 아닌 외세침략에서 더 찾는 일이 과연 주체적 역사인식 방법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식민지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일본의 침략에 있다고 보아 버리면 민족분단의 그것은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에 있고 6·25전쟁의 그것은 동서진영의 냉전에 있다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역사과정에서의 우리는 무엇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공한 부분은 민족의 주제적 역량을 강조하고 실패한 부분은 외세의 작용에 미루어 버리는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닐까. 식민지화의 1차적인 원인을 민족내부에서 찾는 적극적인 자세가, 책임성 있는 역사관이 필요한 것이다.
대학생들에게 당부한 「너그러움과 대인다움」, 재일 동포 젊은이들에게 타이른 「증오심이 아닌 자존심」, 식민지화의 원인을 일본의 침략에서 보다 민족내부에서 먼저 찾으려는 「주체적 역사 인식」은 「불행했던 역사를 씻고 앞으로의 우의를 다짐하기 위해서」식의 평범한 문제가 아니며, 「자신을 채찍질하기에 급한 우리는 남을 책망하려 하지 않는다」따위는 더욱 아니다.
그것은 한시대의 증오심을 자존심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한층 더 크고 높은 것을 들려주기 위한 또 다른 역사의식의 소산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와 같은 다른 의미의 역사인식도 신문이 전해 주는, 관동군의 끔찍한 생체실험의 죄상 『포식한 악마』의 이야기 같은 것을 대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주춤거리게 마련이다. 도대체 누가 감히 악마에게 포식된 독립군의 넋을 향하여 『너그러 우 소서』『증오를 자존심으로 갚으소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말할 수 없다 하여도 그들의 넋만은 오히려『너그러워라. 그것이 이기는 길이다』『야만인에게 희생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전선에서 전사했을 따름이다』고 우리를 타이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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