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재산 사유화는 빠르게, 시장경제는 점진적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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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갑자기 통일이 경제 부처와 금융권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밝힌 데 이어 3월 이른바 ‘드레스덴 선언’으로 불린 대북 3대 원칙(인도적 문제 우선 해결, 공동번영 위한 민생인프라 구축, 동질성 회복)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부가 ‘통일 보고서’를 작성한 것도 이 무렵이다. 물론 통일 관련 연구보고서는 민관을 막론하고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정부가 북한 경제체제 이행에 초점을 맞춰 작성한 보고서는 전례가 드물다. 이 보고서는 특히 구체적인 이행계획과 부작용 가능성, 대응책 등이 상세하게 소개돼 있어 실제 북한체제 개혁의 청사진이 될 가능성이 크다. 통일 비용 중심의 여타 보고서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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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보고서가 제시한 북한 경제체제 이행 기본 원칙은 노동시장화, 가격자유화, 재산사유화다. 북한 경제는 사유재산과 시장을 인정하지 않는 중앙집중식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다. 노동력도 정부가 배분한다. 노동시장화는 북한 근로자들이 스스로 구직활동에 나서게 되는 것을 말한다. 보고서는 정부가 생산성이 떨어지는 북한 근로자의 급여를 남한과 비슷한 수준으로 높여줄 경우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군 병력 감축 인원도 젊은 층 실업을 가속화할 요인으로 지목됐다. 독일도 교환비율이 4대1 수준이던 동독과 서독의 화폐를 정치적 판단에 따라 1대1(임금·연금 등)로 교환했고, 이후 동독 근로자의 임금이 급등하는 바람에 통독 이후 320만 명(당시 독일 인구의 40%)의 실업자를 양산했다. 통독 후 2개월 만에 18만 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 지역으로 넘어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정부가 주민 이주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재산사유화는 소유권이 없는 공공재산의 주인을 찾는 작업이다. 중소기업 매각은 북한 주민 매입 원칙으로 신속하게, 대규모 국영기업 매각은 입찰 대상 제한을 두지 않고 점진적으로 추진된다. 북한 농민에 대한 집단농장 토지의 무상배분은 농촌 주민의 도시 이전 억제와 농민 자산계층 창출을 위한 이중 포석이다. 실질적으로 개인소유 상태인 소규모 경작지나 주택 등은 기존 보유자의 재산권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에 사유재산의 맹아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조치다. 가격자유화는 물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시장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가격자유화 대상에서 제외되는 공공재나 전략물자에는 철도·도로·항만·에너지·전기·의료·석유·쌀·철광석·무연탄 등이 포함된다.

 화폐 통합은 점진적으로 이뤄지며 당분간 남북이 별도의 화폐를 사용한다. 북한의 이중 환율은 단일화되며 초기에는 고정환율제도로 운용된다. 환율 안정화를 위해 남북 통화스와프 등 긴급 자금제공 시스템도 갖춰진다. 통일 과정에서 소요되는 재원 조달 방안으로는 ▶북한 지역에 대한 부가가치세와 소득세 도입 ▶북한 방위비 절감 ▶북한 재건용 기금 조성 ▶파리클럽 등 국제기구 가입을 통한 북한 지역 채무재조정 등이 제시됐다. 통일 비용과 관련해 김용범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지난달 “북한 주민의 1인당 평균소득을 1만 달러로 만드는 데 5000억 달러(약 535조원)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진석·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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