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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곳 조차 없는 이 시대 청춘위해 ‘미생’ 그렸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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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호 15면

웹툰 ‘미생’을 TV 드라마로 옮긴 tvN의 ‘미생’이 화제다. 원작 캐릭터와의 놀라운 싱크로율이 입소문을 타면서 시청률도 3%를 돌파했다. 통속적 내용은 쫙 빼고 리얼리티와 극적 긴장감을 내세워 승승장구하고 있다. 웹툰 시절 인기를 체감한 윤태호(45) 작가는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이같은 제 2의 인기 열풍이 싫지 않은 표정이다.

드라마로 다시 화제 … 웹툰 ‘미생’의 작가 윤태호

“어휴, 계속 인터뷰에요. 하루 종일 이야기했어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손석희 앵커와 대담을 하고, 다른 매체 인터뷰를 하나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5년간의 잡지 연재를 마치고 단행본 20권(초판 기준)으로 ‘야후’를 완간한 뒤 2005년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한 기억이 떠올랐다. ‘야후’는 “잘못에 대한 비용을 치르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그린 만화다. 작가가 20대 후반에 시작해 30대 중반이 되어 끝낸 작품이다. ‘이끼’, ‘당신이 거기 있었다’로 이어지는 이 3부작은 공통적으로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미생’은 달랐다. 주인공 장그래는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청춘이었지만 전작의 주인공들처럼 분노하지 않았다. “일단은 제가 바뀌었죠. 저는 우리 아이들의 기댈 곳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잘못 살고 있지 않아, 그 얘길 해주고 싶었고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죠.”

‘미생’을 설명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기댈 곳이 되고 싶은 욕망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분노하지 않는 장그래, 아버지의 마음 터득
끝끝내 프로기사가 되지 못한 ‘주변인’ 장그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바둑을 가르쳐준 선생님도 없다. 무역에 쓰이는 약어조차 모르는 그는 주변인으로 직장에 발을 담근다. 전작들이었다면, 끝없이 갈등하고 좌절하고, 분노했을 터였다. 하지만 장그래는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물었다.

“태호씨 작품에는 늘 아버지가 부재했었잖아요? 하지만 ‘미생’에선 아버지를 느꼈어요. 원 인터내셔널 직원들의 모습에서 우리 아버지, 또 다른 이의 아버지를 보았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자리에 이제 내가 서 있다는 걸 깨달았죠. 장그래도 언젠가 아버지가 될 테니, ‘미생’은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바치는 만화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윤 작가가 대답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장그래는 인생의 뼈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는 거죠. 인생의 뼈대란 켜켜이 쌓여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먼지 하나하나가 쌓이는 과정을 허투루 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장그래가 그런 사람이다. 윤태호도 그런 사람이다. 1988년 서울로 상경해 고생하다 허영만 문하로 만화계에 입문한 사실은 유명하다. 90년 조운학 화실로 자리를 옮긴 뒤 93년 『월간 점프』에 40쪽짜리 단편 ‘비상착륙’으로 데뷔하지만, 스토리의 부족함을 느끼고 다시 조운학 화실로 돌아간다. 96년 성인용 만화잡지 『미스터 블루』에 ‘혼자 자는 남편’을 연재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오래도록 켜켜이 쌓아와 오늘에 이르렀다.

독자와 소통하는 웹툰이라 가능한 작업
단행본 100만 부 판매, 드라마의 폭발적 인기 등으로 새삼스럽게 주목받는 것 같지만, ‘미생’은 2012년부터 2013년까지를 대표하는 만화다. 2012년 1월 20일 다음 만화속세상에 미생 착수를 시작으로 2013년 7월 19일 145수로 연재를 마무리했다. 단행본은 2012년 9월 15일 1권을 시작으로 2013년 10월 5일 마지막 9권이 나왔다. 2012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대한민국콘텐츠대상, 2013년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만화상까지 싹쓸이했다. 그런데 2014년 11월 다시 ‘미생’이다. 소감을 물었다.

“작품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지점이 있어요. 그런데 이 아이에게 생명력이 있다면 어디까지 자라려고 그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짐작할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요. 100만 부라는 크기가 주는 부담이 있어요. 말 한마디를 하는 것도 그렇고, 어디에 나가는 일도 그렇고. 어려워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낯선 영역이 계속 올 텐데, 이 낯선 영역을 받아들여 익숙하게 만들어야 할지, 계속 낯설게 놔둬야 할지 고민이에요.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워낙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요.”

‘미생’은 1년 7개월간 주 2회를 마감했다. 연재 중에 ‘인천상륙작전’도 함께 작업했으니 주 3회를 마감한 셈이다. 쪽수로 따지면 ‘미생’이 15쪽 2회로 30쪽. 거기에 ‘인천상륙작전’이 18쪽이니까 총 48쪽을 한 주에 작업했다.

“주 3회 마감은 정말 힘들었어요. 남극에 갈 때는 9회 분을 미리 마감하고 갔어요.” 그냥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맙소사!” 그랬더니 윤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분이 와서 도와주신 것 같아요. 실제로 여러 분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죠.”

직장 생활을 해 보지 않았던 윤 작가는 현업에 있는 수많은 직장인을 통해 ‘미생’을 완성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의문점이 생기면 만나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분들을 만나 만화를 그리며 저도, 주인공도 같이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아무래도 40대니까 이야기를 들으면 깨닫는 지점이 있었죠. 장그래는 어리지만 바둑을 뒀으니까 통찰력이 있는 거고. 연재를 통해 저도, 주인공도 발전된다는 느낌을 처음 경험하는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웹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까. “맞아요. 웹툰에는 고무되는 지점이 많아요. 댓글, 그러니까 독자반응이죠. 제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계속 확인할 수 있거든요. 출판 연재는 마감 후 직접적 피드백은 없으니까, 그냥 힘들면 며칠 쉬고 다시 마감하는 거죠. 하지만 웹툰은 계속 독자의 관심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긴장을 벗어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거에요.”

임시완·이성민 곱창집 취중연기 놀라워
장그래에서 시작한 윤 작가는 어느새 오 과장으로 진화했다. ‘미생’은 당초 위즈덤 출판사에서 ‘바둑’이라는 아이템으로 기획된 만화였다. 이걸 윤 작가가 직장만화로 틀었다. 출판사가 흔쾌히 “작가 방향에 100% 동의”해 주었다고 한다.

‘미생’ 이전에도 직장을 다룬 만화들이 있었다. 직장인의 애환에서 나온 웃음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과장된 성공 스토리를 담아냈다. 김수정 작가의 ‘날자! 고도리’나 홍윤표 작가의 ‘천하무적 홍대리’가 전자이고, 80년대 만화방의 재벌극화가 후자다. 그런데 ‘미생’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예전에 선생님들이 했던 직장만화를 보면, 직장인이 힘들다는 걸 전제로 해요. 힘들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야기죠. 힘든 건 각각의 이유가 있는 거에요. 10명이 10명이다. 각각 고통의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고, 또 공통의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통 지점은 직장의 속성인가? 업무의 속성인가? 개별적으로 다른 고통은 개인의 개성인가? 이런 질문을 한 거죠.”

그는 직장에서 직원으로 초점을 좁혀나갔고, 마침내 캐릭터에게 다가갔다. “누군가가 뭔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걸 이루기는 어렵다는 드라마의 원칙을 발견한 거죠. 그렇게 장그래, 오과장이 나왔습니다.” 디테일을 통해 구체적인 ‘그’의 모습으로 들어간 것이다.

‘미생’은 만화로, 그리고 지금 새롭게 TV에서 어떤 드라마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드라마 ‘미생’은 무척 만족스럽죠. 임시완 씨와 이성민 씨의 ‘곱창집 취중 연기’는 놀라웠어요. 강소라 씨는 만화보다 원색적 느낌이 더해졌어요. 원작에서는 약간 애늙이같은 면도 있었는데. 변요한 씨는 만화의 한석율 역을 맡았는데, 존재감이 더 강해졌어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그리고 싶었는데, 드라마에서 완성시켜 준 것 같아요. 강하늘 씨의 장백기 연기는 만화와 비교해 드라마에서 결이 하나 더 추가되었더라고요. 입사를 목표로 열심히 준비한 사람의 당연한 질시랄까, 이런 요소가 더해져 인물이 풍부해 졌어요.”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서 나의 모습, 내 가족의 모습을 발견했다. 두 번째 불고 있는 ‘미생’ 신드롬은 “자기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아가 성취되는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미생’ 2부는 2015년 초에 연재를 시작한다고 한다.

글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comixpark@gmail.com, 사진 위즈덤하우스·tvN·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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