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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농지개혁(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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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농지개혁은 광복을 실감케 한 최대의 변혁이었다.「농토는 농민에게」라는 개혁의 방향은 시대적 추세고 물결이었다. 그렇다해도 이 개혁은 수백년을 지탱해온 농지제도를 근원적으로 바꿔놓는 엄청난 변화였기에 최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숙제를 떠맡은 초대 내각엔 재량의 폭이 좁았다. 그만큼 이미 개혁의 기초는 그 테두리가 잡혀있었고 경제라는 측면보다는 정치라는 측면이 이 문제를 재단하는 기준이 된 상황에 밀려가 있었다.
농지개혁은 50년에 단행되지만 문제제기는 8·15직후였다. 미군정은 농지개혁을 점령지 정책의 제11호로 손꼽고 있었다. 그들은 아시아 지역의 소작 제도는 이 지역 농민을 농업노예 상태로 방치한 요인이라고 봤고 그 중에서도 한국이 소작농민이 가장 많은 나라라고 손꼽고 있었다. 땅 없는 농민에게 농토를 나눠 갖게 한다는 것은 미군정의 지침이었다.

<자작농은 불과 13%>
45년 당시 남한의 경지면적은 논이 1백28만정보, 밭이 1백4만정보로 총 2백32만정보. 이 가운데 자작농지는 36.6%인 85만 정보에 불과했고 63.4%인 1백47만 정보가 소작농지였다. 농가는 총 2백6만5천가구. 자작농이 13.8%인 28만4천5백가구에 지나지 않고 48.9%인 l백만9천가구가 소작농이었다. 그나마 자작농이라해도 소작농에 가까운 반소작농이 34.6%인 71만6천가구나 됐다.
미국의 진단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개혁을 서둘렀다.
미군의 한국 진주는 9월8일, 그로부터 한달이 못된 10월5일 미군정장관「아널드」소장은 최고 소작료는 총생산량의 3분의l을 넘지 못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3·1제로 불리는 이 법령은 4할 내외의 소작료를 물던 가난한 소작농들에겐 해방이 가져온 첫 복음이었고 농지개혁의 전주였다.
46년2월 미군정은 귀속토지와 재산을 관리할 신한공사를 설립하면서 동시에 토지개혁법안 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신한공사는 한국인 농지를 사들여 최대 지주가 된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약칭 동척)재산을 비롯해 일본 법인과 일본인의 소유농지를 관리하기 위한 회사였다.
공사의 자본금은 1억원, 관리 농지는 28만2천4백80정보로 남한 총경지 면적의 약13%였고 전체 농가의 26.8%인 55만4천가구가 그 밑에 들어갔다.
신한공사는 일선 농장을 통해 30%의 소작료를 징수했다. 다만 소작인은 경작인으로, 소작계약은 경작계약, 소작료는 경작료로 개칭했다. 논·밭의 경작료는 현물로, 과수원·뽕밭 등 다년생 식물은 현금으로 받았다. 47년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l년간의 경작료 수임이 13억5천6백92만원에 이르렀다.
신한공사 시절부터 농지 문제를 다루어 온 전경식씨(60·현 농수산부지정과 직원)의 회고. 『신한공사는 동척 기구를 그대로 인수, 총무부와 농·광·광무 및 임업부가 있었고 직원은 구 동척 직원이 70%, 새로 들어온 사람이 30%정도였죠. 구 동척 직원들은 담당분야의 베테랑급이었으나 아무래도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새나라를 세우는데 중요한 일을 맡아 한다는 사명감들도 대단했읍니다.
신한공사와 병행해서 추진한 토지개혁법안의 기초작업은 미국무성이 특별히 파견한 경제전문가 「번즈」박사를 수반으로 한 「키니」「앤더슨」등 세 사람에 의해 추진됐다.
이들은 당초 남한의 전 토지에 대한 농지개혁을 구상했다. 그러나 한국의 일반 여론은 토지 개혁을 미군이 아닌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해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자 일본인 농업 재산만이라도 소작 농민들에게 주기로 방침을 바꿔 번즈안을 성안했다.
그런데 46년8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이 구성되자 미군정은 47년초 번즈안을 입법의원에 넘겼다.
당시 입법의원의 산업노농위원회는 토지개혁 초안을 만들고 있었다.
산업노농위원회를 리드한 사람은 윤건웅 위원장(6·25 때 납북). 그는 정부 수립직후 농지개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강신국씨을 초대, 농림부농지국장으로 조봉암 장관에게 추천한 인물로 대단한 다혈질이었다.

<입법의원들이 기피>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 1회 졸업생으로 중국군 소좌로 있다가 해방후 김규식 박사를 따라 귀국, 김 박사가 입법의원의장이 되자 산업노농위원장을 맡았다. 열렬한 농지개혁 주창자로 하루 빨리 농민을 지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늘 입버릇처럼 떠들었다.
산업노농위원회는 번즈팀과 합동회의를 거치며 47년12월 이른바 남조선입법의원 토지개혁 법안을 성안, 입법의원 본회의에 넘겼다.
전문28조로 된 이 토지개혁안은▲자경치 않는 토지▲농가 l호당 3정보를 넘는 전답▲정부가 인정하는 후생 및 공공기관 소유로 경작 능력을 넘는 부분은 매수한다. 보상 가격은 연평균 생산량의 3백%(3배)로 15년간 연부 상환하고 매수한 농지는 현 경작자에게 최우선으로 준다는 것. 이 법안에서 제시된 유상매상, 유상분배, 농지상한선 3정보 등의 원칙은 정부 수립후 시행된 농지개혁의 방향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안은 박건웅을 중심으로 한 산업노농위원회와 소장입법의원들의 의욕이자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47년12월23일 본회의에 넘겼으나 입법의원은 이 법안을 기피해 연말휴회를 결의해버렸다. 이듬해 1월12일 회의는 소집됐으나 성원 미달로 유회되고 말았다. 이튿날도 계속 성원미달이었다.
입법의원의 토지개혁안 심의 기피는 좌우익의 공동작전이었다. 좌익은 자기들이 남한을 점령한 뒤 스스로의 손으로 농지개혁을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우익은 입법의원 자신이 토지 자본가이거나 지주의 압력을 받았다. 특히 우익 가운데서도 토지 자본을 배경으로 한 한민당의 반대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당시 입법의원 산하 조선산업재건협회 상임이사로 있었으며 후에 초대 농림부농지국장을 지낸 강신국(78)의 회고. 『한민당의 반대와 지연작전은 아주 노골적이었죠. 특히 서상일씨와 김준연씨가 앞장서 반대했읍니다. 한민당의 태도에 화가 치민 박건웅 위원장도 만만치 않았읍니다.
그는 한민당 의원들에게 <이농들 왜놈 가방이나 들고 다니면서 친일한 놈들. 남들이 독립 운동한다고 가산을 탕진했을 때 동족의 재산을 긁어모은 놈들이 농민을 어쩌려고 반대하느냐>고 호통을 칩디다. 그러자 서상일씨는 <이 사람 왜 이래, 이 왜이래>하며 얼버무렸읍니다.
그러나 한민당의 반대도 「미군정 아닌 새 정부가 할일」이라는 것이었고 개혁 그 자체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었다. 그보다는 토지 논쟁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 놓은 것은 좌익의 선전공세. 좌파 농민단체인 전국농민연맹(약침 전농)은 토지개혁안을 내놓고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펐다.
그들은「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를 무상 몰수, 무상 분배로 타파해 농민을 해방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전평과 전농은 농경지뿐만 아니라 산림도 몰수해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익의 이런 공세는 46년3월에 단행된 북한의 토지개혁을 업은 정치공작이었다.
그들은 미군과 우익은 토지개혁의 능력도, 성의도 없다고 몰아치며 농민 봉기를 선동했다. 47년4월6일 남원에서는 권총과 대참·곤봉 등을 가진 농민 2백여명이 남원본서와 운봉지서간의 경비 전화를 끊고 도로 14개소에 나무와 둘로 바리케이드를 친 뒤 7일 새벽 운봉지서를 습격했다. 합천에서도 좌익이「농민 해방을 시키기 위해 해방군이 지금 진격해오고 있다.
농민들은 각자 가질 수 있는 대창·몽둥이·낫을 갖고 지서를 때려부수라」고 선동, 약6백여명의 농민들이 지서를 습격했다.

<죽창들고 지서습격>
불안해진 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앞으로 나라에서 토지를 몰수해 재분배를 하는데 기름진 땅을 빼앗기고 만다. 그러니 네가 부쳐먹는 땅을 네가 적당한 값에 사라. 만일 네가 사지 않으면 땅을 떼어 내 친지나 돈 있는 사람에게 팔겠다…』 이렇게 한편으로 꾀고 한편으로 위협했다.
당장 돈이 없으면 증서만 받고 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부 선량한 소작인들은 소도 팔고, 집도 팔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꾸기도 해 소작해온 토지를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토지 방매가 유행하자 군정청은 신한공사에서 관리하던 귀속농지만이라도 분배하기로 결정, 48년 3월22일 남조선과도정부법령l73호(중앙토지행정처설치)를 공포했다.
안민정 장관은 법령 공포에 즈음해『적산농지의 분배는 독립정부 수립후 단행함이 옳다고 하는 편도 있으나 총선거를 앞두고 적산농지부터 분배를 착수하는 것은 시대가 요청하는 일이며 농민들도 부담이 무겁지 않은 본 조치를 환영할 것이다』라고 했다.
「딘」군정장관도 『이로써 미군이 조선에 진주한 이래 가장 중요한 업무를 완료했다. 이 조치는 조선의 농이 28%이상이 소작농으로부터 자기와 그 후손이 소유할 수 있도록 땅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법에 따른 분배 대상지는 신한공사가 관장하고 있는 모든 토지중대지·과수원·목장·공공 용지를 제외한 농지였다.

<곳곳서 농지 방매>
농지분배는 토지행정처와 매수자간의 매매계약 형식으로 해 매수자에게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주되 연부액의 상환 보장을 위해 중앙토지행정처가 채권자가 되는 저당권설정계약을 맺었다.
당시 신한공사가 소유하고 있던 귀속농지는 논 20만5천9백정보, 밭 6만2천6백정보, 대지 3천3백정보, 과수원·뽕밭 4천2백정보 등 28만6천7백정보에 농가수가 55만4천호였다.
이 조치는 4월1일에 시작돼 일사천리로 진행됐는데 일반 농지 28만2천4백정보 가운데 논 18만9천5백정보, 밭 5만6천정보 등 모두 24만5천5백정보가 분배돼 귀속농지의 87%가 농민의 손에 들어갔다.
당시 군정청은 4월8일 양주·고양의 농민 l백여명에게 4백50평씩15정보를 분양하면서 토지 분양식을 거행했다. 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증서 수여와 농민대표의 답사,「하지」장군(대리)「딘」군정청장관·안민정 장관의 축사가 있고, 여흥까지 열어 자축했다.
당시 미군정에 의한 토지분배에 대해 일부에서는 일반농지를 제외한 채 귀속농지만을 분배한다는 것은 농지개혁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러나 소작농민들은 어쨌든 농토를 받게돼 매우 환영했다. 뉴욕타임즈도 찬양기사를 실었다.
초대 농림부 농촌지도국장을 역임한 조동필 교수(고대)의 말.
『미군정이 우리의 귀속농지를 자기들 마음대로 분배한 것은 귀속 재산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군정은 입법원토지개혁안으로 남한 전체의 토지를 개혁하려했던 것인데 실패하자 귀속 토지만 분배한 것인데 이것은 어쨌든 제1차 농지개혁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나중에 정부수립과 동시에 농지개혁을 서둘러 단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요인도 됐습니다.』【이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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