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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웃음 든든한 위안 화젯거리 만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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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호 34면

JTBC 드라마 ‘유나의 거리’속 사람과 공간은 우리 드라마에서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콜라텍, 빨래가 널린 옥상, 고물상, 꽃이 가득하고 달을 올려보는 마당, 그리고 집들이 오밀조밀한 골목길. 소매치기 여인, 개장수, 페인트공, 조폭이었던 깡패. 한 아파트 촌에서도 임대 주택과 일반 분양을 구별 짓지 못해 안달인 현실 속에서도 내 이웃에 저런 사람이 있었다면 고개를 돌려버렸을 그런 사람과 풍경이었다. 그곳 사람들 역시 생계에 급급해 그악스럽고 세세한 감정도 없이 살아가는 납작한 성격일 거라고 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드라마에서 셋방에서 자살한 여자에게 주인 여자는 “월세도 밀리고 죽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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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운경 작가의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과 이야기는 그런 사람과 공간에 마치 마법을 풀어놓듯 생생한 기운을 불어넣으킨다. 그들이 나의 모습, 나의 상처, 나의 기억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리얼리티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단 한 순간도, 단 하나의 인물도 뻔하거나 전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조폭과 깡패 출신들은 마초적이지 않다. 소매치기는 “도둑질도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안되는 도리가 있다”고 말한다. 한때는 날리던 조폭이었던 70대 노인은 언제 혼자 굶어 죽을지 모르는 쓸쓸한 노인일 뿐이다. 애정 전선의 핵심인 남녀 주인공은 42회나 가서야 겨우 입을 맞추다가 그마저 들킨다. 콜라텍의 노인들은 짝맞추는 일 말고도 정말로 춤을 열심히 배운다.

하지만 악다구니 쓰며 사는 그들에게도 사랑과 인생에 대한 서늘한 통찰과 세밀한 감정이 있다. 돈밖에 모를 것 같던 여주인은 사랑에 빠진 의붓딸에게 “사람 싫을 때보다 좋을 때가 더 힘들어. 싫을 때는 안 보면 되지만 좋을 때는 보고 싶어서 힘들잖아”라며 말하고, 천사 같은 남자의 애정에 싸늘하게 대하던 여주인공은 “라면 짜게 먹어 싱겁게 먹어?”라며 에둘러 배려와 사랑의 감정을 내비친다. 70대 노인은 “종로 제일의 주먹잡이와 겨루다 비가 와서 들어간 천막에서 현인의 ‘비가 온다’가 흘러나왔지”라며 그런 인생 속에도 잊지못할 추억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정의의 사도처럼 제비족 남자를 흠씬 두들겨팬 뒤 주인공은 “내가 때린 니가 불쌍해서 운다. 너를 때린 내가 비참해서 운다”라며 우리를 울컥하게 하며, “유나씨는 순수한 축복이 아니라 가끔씩 질릴 때도 있는 축복이야”라는 근사한 말로 사랑의 본질을 꿰뚫는다.

죽일 만큼 나쁜 놈도, 궁극적으로 착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선함과 악함, 재주와 한계를 가진 인간일 뿐이다. 김운경 작가가 부리는 마법의 비결은 가난한 사람들, 상처입은 사람들의 가난과 상처를 극적인 효과만을 위해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데 있다.

사람들과는 못 어울리고 개하고만 통한다는 남동생에게 “그럼 우리를 개라고 생각하고 웃어봐”라고 한다든지, 원수 같은 사람을 응징할 때마다 중요 부위를 위협하며 가위를 등장시키더니 “이건 보통 가위가 아니야, 갈비집에서 고기 자르는 가위야”라며 질겁하는 장면, “쌍도끼를 그리랬더니 잘못 알아듣고 산토끼를 문신으로 그려놨지 뭐야”하는 식의 원초적인 유머는 속시원한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그러나 그 문신 이야기와 함께 던지는 “뭐든지 처음부터 잘해야 해”라는 조폭 선배의 말 한마디는 오랜 세월의 회한을 담은 깊은 울림을 전한다.

과거에 무언가를 하나씩 잘못했던 사람들, 그래서 이제는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게 겨우 목표인 인생들, 하지만 그 과거가 마음속에 켜켜이 상처로 남은 사람들. 평범한 삶을 살기가 이토록 힘들어서 특별해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그걸 보는 우리도 상처 하나 없는 이가 없다.

결국 사는 공간과 모습이 달라도 같은 인생이구나, ‘유나의 거리’가 준 것은 그런 뭉클한 깨달음이었다. 유난히 위로받고 위안해야할 일들이 많았던 시기에 우리를 울고 웃게 해주었던 이런 위대한 드라마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언제나 맑고 환한 웃음으로 변치 않는 사랑을 지켰던 주인공 창만의 얼굴처럼 따뜻함과 애틋함으로 ‘유나의 거리’가 안겨줬던 든든한 위안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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