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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 생각은…

법 바꿔 자막방송 의무화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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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보화시대가 많은 사람에게 의사소통 및 정보 접근에 있어서 보다 폭넓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청각.언어장애인 및 난청인들의 측면에서 보면 정보 취득이 가장 난해한 부분은 역시 정보의 문자화가 쉽지 않은 영상 및 음성을 다루는 정보화기기다. 예를 들어 TV.전화.휴대전화, 나아가 인터넷(컴퓨터) 등은 소리를 통한 정보가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어 청각.언어장애인 및 난청인은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에는 예전과 달리 활자화된 문자만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보고 듣는 세 가지 언어활동이 모두 정보 습득의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각장애인들은 듣기의 언어기능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원초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엄청난 양으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오히려 정보의 굶주린 불평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공중전화나 공공장소에 문자전화기가 설치돼 있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중계 서비스도 있으나 우리나라는 이들에 대한 배려는커녕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고 있다. 휴대전화는 문자메시지의 송수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TV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부분적으로는 자막방송이 시행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도 미미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방송법에 자막방송의 근거는 마련됐으나 법 규정이 의무조항이 아닌 선언적 수준이기 때문에 각 방송사가 임의로 알아서 하는 사항으로 돼 있다. 따라서 자막방송의 실시를 의무조항으로 법을 개정해 일정 부분까지는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 그리고 자막방송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예산은 교육인적자원부.보건복지부.방송위원회.방송사 등 관계부처가 일정한 기금을 마련해 지원해야 하겠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자막방송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의 경우 자막방송을 실시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자막방송을 강제하기 위한 법률적 제도와 예산 확보 등에 대한 준비를 갖추고 13인치 이상의 모든 TV에 자막수신기 내장을 의무화한 후 자막방송을 실현해 나간 것은 아주 좋은 예다.

아직은 자막방송의 양이 많지 않아 전반적인 청각장애인의 삶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완전히 시각정보에만 의존해 정보의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이해가 불가능해 TV의 내용을 소설을 쓰듯 주관적으로 이해했으나 자막방송을 통해 현재의 사회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또한 일반인과의 간격이 좁혀져 자막처리가 되는 TV를 보면서 가족 또는 친구들과 대화의 시간이 많아졌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이야깃거리가 생겨 주위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기여하게 됐다. 그러나 자막방송에서 가장 큰 수혜자가 청각장애 청소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교육방송(EBS)에서 교과과정을 자막처리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선택적 배려로 인식하는 잘못된 생각을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안정근 (사)한국자막방송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