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2)제76화 ?맥인맥(31)|평양 구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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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해방 1년 전인 44년에 그 좋다는 평양 구경을 했다.
?주사람으로 평양에 가 대동고무 전무이사로 있던 전은태씨의 초청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평양에 간 것이다.
나 혼자 경의선을 타고 평양에 갔는데 기차가 역에 도착하니 여기저기서 정사복 경찰관과 헌병이 나와 갑자기 삼엄한 경계를 펴고 일반승객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웬일인가 싶어 차창으로 밖을 내려다 보았더니 뒷머리가 하얗게 흰사람이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는데 누군가가 아부신행 총독이라고 말했다.
출찰구에 나갔더니 전은태 전무가 마중나와 있었다.
나는 평양 여행에서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들이 모두 의사였다.
이천도립병원장을 지낸 조진석 박사가 평양에서 조진석 의과의원을 개업하고 있어서 그의 초대를 받았다.
조박사가 이천에 있을 때 시골에 살던 내 세째매부(신좌균)가 복막염으로 위독, 도립병원에 입원해서 조박사 집도로 수술을 받은 일이 있어 나와는 구면이었다.
그는 평양에서 나를 만나 감개무량하다면서 환대했다.
조박사는 나를 초대해 놓고,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그 위에 냉면틀을 올려서 냉면을 뺐다.
처음으로 보는 냉면틀이 신기해서 이것저것 살펴봤다. 평양사람들은 웬만한 집이면 모두 냉면틀을 갖춰 놓고 즉석에서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냉면을 좋아해 이곳저곳 다니면서 먹어보았지만 그 때 조박사 집에서 먹은 냉면 맛은 잊을 수가 없다.
평양사람으로 경성제대 의학부를 나와 고향에 소아과의원을 열고 있던 배영설 박사집에도 갔다. 배박사는 서울에서 사각모를 쓰고 의과대학에 다닐 때부터 잘 아는 터여서 더없이 반가와했다.
그는 얌전한 사람이었다.
집에 찾아갔더니 음식을 괴어서 큰상을 차려냈다. 무슨 잔치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풍성했다.
배박사는 1·4 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 의정부에 「북진의원」이란 병원을 냈다.
처음에는 외로와서 견디지 못하고 울고불고 야단이더니 주위사람들의 권유로 재혼해 아들·딸을 낳고 잘 산다.
그러나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못 잊어하는 애틋한 마음과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의지를 담아 「북진의원」이란 뜻있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열심히 일한다.
나를 안내해서 평양 구경을 시켜준 사람은 김재덕씨였다. 그는 평양을 눈감고도 알 수 있는 토박이였다.
대동강·연광정·모란봉·을밀대·능라도·부벽루는 물론 고구려 고분까지 빠짐없이 보여줬다. 능라도의 모래사장이며 주위의 무우밭·배추밭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동강 가에는 버드나무가 많았다. 부벽루에 올라갔더니 해강(김규진)이 쓴 「제일강산」이란 현판이 손을 반겨 맞았다.
평양 구경을 하고 마지막으로 사귄 친구가 건축가 김중업씨의 백씨인 운여 김광업씨다. 운여는 평양에서 대명안과를 내고 있었다.
그는 의사인데도 글씨도 잘 쓰고 전각도 잘 하는 멋장이였다.
운여는 내가 평양에 온 기념으로 도장 두방을 새겨줬다. 하나는 낙랑고분에서 나온 관재목인 새까만 나무토막에 「월전」이라 새기고, 다른 한방은 반달형 회향목에 「장씨」라고 새겨서 내게 선사했다.
이걸 애지중지 지니고 쓰다가 부산 피난 때 그림이라도 그려서 밥을 먹을 양으로 채색과 인장을 모두 챙겨가지고 갔다가 잃고 말았다.
영도의 민가 2층을 세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철농(이기우)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셨다.
나는 그가 전각의 대가여서 『이런거 본 일 있어』하고 운여가 파 준 새까만 도장을 보였다.
철농은 술취한 김에 평양서 가지고 온 도장을 받더니, 『이까짓 거』 하고 휭하니 집어던졌다. 그 이튿날 날이 밝자 새벽같이 일어나 집 안팎을 샅샅이 찾아봤지만 운여가 새긴 「월전」이란 도장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해서 귀물은 내 손을 떠나고 운여마저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운여는 환도 후 서울서 서예연구원을 하다가 부산에 내려가 평양서의 이름대로 대명안과를 개업했다. 미국에 사는 딸에게 가 있다가 그만 거기서 타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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