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로또, 그냥 놔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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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는 아직 로또를 한번도 사본 적이 없다.

일상이 지겨울 때면 인생역전을 한번 해볼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는 한다. 그러나 45개 숫자 중 6개를 맞히는 8백14만분의 1의 확률에 매달리느니 마음 한번 크게 제대로 바꿔 먹는 게 훨씬 쉬울 것 같고, 재미로 치면 로또보다 카드나 화투가 더 낫다.

그런 내가 로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로또의 운명도 뒤바뀌어 버릴지 모르겠다는 것 때문이다.

어떤 제도를 시행한 지 반년도 안 됐는데 여기저기 뜯어고친다면 대번에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정책의 일관성을 지켜라, 처음부터 왜 신중하지 못했느냐 등등-. 지난해 12월에 도입된 로또가 바로 그런 처지다.

새 제도가 나온 이후 이런저런 규제와 수정이 뻔질나게 가해진 것으로 따지면 로또는 가히 1등감이다. 1등 당첨자가 계속 안 나오면 다섯번까지 몰아서 준다고 시작하더니 금방 두번까지만 몰아주기로 고쳤다.

그리고 광고를 크게 하지 말아라, 청소년 보호대책을 마련해라 등의 규제가 덧붙여졌고, 고건 총리까지 나서 복권 관련 간담회를 했다. 복권 관련 법을 정비해야 한다, 복권관리공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의원입법도 두 건이나 나와 있다.

그러고도 계속 1등 당첨금 상한선을 정해야 한다, 1등 당첨자에게 돈을 몰아주는 비율을 낮춰야 한다는 등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다 과열.사행심에 대한 우려 때문인데,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 한번 외치고 나서면 아무도 제대로 반론을 펴지 못하는 가장 강력한 단어가 아마 '위화감' 다음에 '과열.사행심'일 것이다.

4백7억원의 1등 당첨금이 나왔을 때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사행심을 걱정했다. 그러나 지난 주말 추첨에서는 1등이 23명이나 나왔다. 이들은 7억여원씩밖에는 가져가지 못한다. 이런 게 바로 '몰아주기'로 만들어진 로또의 본디 모습이다.

사실 로또 입장에서는 초기에 4백7억원의 당첨금이 나왔던 것이 불운이었다. 계산상으로는 2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일이 너무 빨리 벌어졌기 때문이다.

4백7억원이 나올 확률은 한번 1등 없이 넘어갈 확률에다 두번째에는 1등이 한명만 나올 확률이 겹치는 0.0166%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 놓고 매번 그런 일이 벌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지금과 같은 구조대로 로또를 2년이고 3년이고 그냥 놓아둔다면 1등 당첨금은 평균 38억원에 가까워지게 돼 있다. 만일 1등 당첨금을 깎아 사람들이 로또를 덜 산다면 당첨금은 더 낮아진다.

과열 걱정도 그렇다. 한국 사람들이 유별나다고 하지만 1994년과 지난해에 각각 로또를 시작했던 영국이나 대만에서도 처음에는 열기가 대단했으나 반년쯤 지나고 나서는 알아서들 정신을 차렸다.

일찍부터 로또를 해 온 다른 나라들에서 사행심 걱정을 한다는 소리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를 지을 때나 하버드 대학 발전 기금을 모을 때 등 로또를 아주 유용하게 활용한 사례는 많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로또를 놓고 걱정하기 전에 왜 로또가 나왔는지를 곰곰 생각해봐야 한다. 기부문화가 척박한 우리 사회에서 '좋은 일'을 할 돈을 모으기 위해, 여러 종류의 복권을 인기있는 하나로 모아가기 위해 등장한 것이 로또다.

지난 3월 말까지 9천6백45억원어치를 팔아 3천68억원의 기금을 쌓았다. 이걸 10개 부처.지자체가 기금으로 나눠 가져가고 있으니 사람들의 눈에는 '좋은 일'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로또나 한번 사봐야겠다. 모처럼의 로또도 온갖 규제와 수정으로 '누더기 복권'이 되기 전에. 기부를 한다는 심정으로.

김수길 기획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