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홍콩서 뜨는 한국인 여성 CF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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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국 여성으로서 방송 광고(CF) 제작 감독으로 대성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홍콩의 광고제작업체 '슈팅갤러리' 의 공동대표인 손정(38)씨가 14년 전에 내린 결론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였다.

"당시 저는 대학(이화여대 경영학과)을 졸업하고 광고대행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수입도, 전망도 괜찮은 편이었어요. 그러나 제가 원하는 감독 일을 할 수 있다는 비전이 없었습니다. 국내 다른 업체에서도 안될 거라고 했어요. 일 자체가 여자에겐 맞지 않다는 것이 그들이 댄 이유였지요."

그래서 그는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버클리에 머물며 장차 할 일을 궁리하던 중 국내 근무 시절 인연을 맺었던 '슈팅갤러리'에서 미국 현지촬영 작업에 참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현지 프로듀서로 1년여 일하며 싱가포르 타이거 맥주, 지멘스, 알카텔 등의 CF 촬영에 힘을 보탰다.

1993년 정식 직원으로 채용돼 홍콩으로 간 그는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CF 감독 래리 슈 밑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하며 광고 일을 본격적으로 배워나갔다. 95년 결혼해 남편이 된 래리 슈는 '광고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D&AD상을 탄 첫 아시아인이다.

손씨는 96년 그토록 갈망하던 CF 감독이 됐다. 나이키사가 중국 시장을 겨냥해 만든 트레이닝복 광고가 그의 데뷔작.

"세계적 감독인 남편을 존경하며,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광으로 CF 감독이 됐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광고계란 능력없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코카콜라.산요.유니레버.노키아 등 다국적 기업과 삼성전자.현대모비스 등 한국업체들의 TV 광고물을 제작했다. 그가 만든 CF는 중국을 비롯해 홍콩.대만.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화교권에 주로 방영된다. 그러나 최근 촬영한 P&G의 샴푸 광고는 화교권을 넘어 유럽과 호주 시장에서도 통했다. 덕분에 P&G가 자사 제품 광고를 제작하는 전 세계 광고업체를 대상으로 시상하는 '글로벌 엑셀런트'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CF 감독의 일을 '노가다'라고 표현하면서도 "여자이기 때문에 못할 정도는 아니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14년 전에 비해 아직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한국의 풍토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려하지 않았다.

휴식차 한국에 잠깐 다니러 왔다는 그는 27일 출국할 예정이다.

글.사진=왕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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