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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위대한 기부' 위해 '기부 불신' 내려놓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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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원혜영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2009년 2월 4일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열린 세계적인 오픈 콘퍼런스 TED에 강연자로 나섰다. 그는 연설 도중 갑자기 유리병에 담아온 말라리아 모기를 강연장에 풀어놓았다. 당연히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모기를 피하면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그는 모기들이 말라리아 병원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청중을 진정시켰다. 이어 가난한 사람들이 말라리아로 받는 고통에 대한 경각심을 설명하면서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 이듬해인 2010년, 빌 게이츠는 워런 버핏과 함께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억만장자들에게 생전 또는 사후에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기부서약 캠페인(The Giving Pledge)을 제안했다. 이 캠페인에는 현재 127명이 동참을 선언했다. 금액으로는 약 56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아쉽게도 동참한 한국인은 아직까지 없다.

 빌 게이츠의 이러한 기부 리더십 못지않게 얼마 전 미국의 마일스라는 아홉 살 아이의 20달러 기부 이야기 또한 감동적이다. 아이는 주차장에서 20달러 지폐를 주워 비디오게임을 사려 했다가 식당에서 군인을 보고는 이라크전에서 전사한 아버지가 생각나 정성스레 편지를 써서 함께 전해주었다. 이에 감동한 이 군인이 또 다른 이에게 20달러를 기부하면서 이야기가 퍼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뉴스에 소개되면서 전국에서 마일스 앞으로 약 3억원이 기부됐다고 한다. 빌 게이츠뿐만 아니라 아홉 살 소년까지도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이 위대한 힘이 바로 기부가 가진 힘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기부의 위대한 힘’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에는 넘기 힘든 벽이 있다. 기부를 가장한 불법행위들이 ‘기부 불신’이라는 높은 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제로 기부를 하지 않고 허위 영수증 발급을 통해 불법 소득공제를 받도록 하는 기부자와 기부단체 간의 검은 거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또한 고액 기부의 중심이 되어온 기업인들의 기부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 부실이라는 비판의 트라우마에 갇혀 진정성보다는 형식과 규모에 치우친 방어적 기부의 성격이 짙었다.

 기업이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켰을 때 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기부를 하거나, 일부 대기업들이 공익재단을 통해 사회 공헌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기업의 경영권 이전이나 보호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기부를 비리와 탈세, 경영권 보호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부 나쁜 인물들 탓에 진짜 기부하려는 사람들을 대하는 정부의 시각은 곱지 않다. 마치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현행 ‘기부금품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은 1951년 ‘기부금품모집금지법’으로 시작해 1995년 ‘기부금품모집규제법’을 거쳐 2006년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부 활성화법’이라기보다는 ‘기부 규제법’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기부금을 모집하는 데 다른 법률과 중복되는 과도한 의무를 부여하고 처벌하는 조항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세특례제한법’과 ‘상속세 및 증여세법’ 등 세제 관련법들도 기부자들에 대한 세제 혜택에 너무나 인색하다. 혜택은 고사하고 불이익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로 지주회사로 전환한 기업의 주주가 지주회사 전환에 따라 취득한 주식을 공익재단에 기부하려고 할 때 실제로 주주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도소득세를 부과하고 있다. 세금을 내면서 기부를 하라는 얘기다.

 이러다가 자칫 일부 나쁜 기부자들 때문에 자유롭고 다양하게, 무한히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기부문화 전체를 말살하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까 우려스럽다.

 참 다행인 것은 이렇게 기부에 대한 비우호적인 제도와 시각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과 기업들의 기부 참여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많은 국민이 관심을 보여준 아이스버킷 열풍에서도 보았듯이 우리 국민의 기부에 대한 열정과 참여의식은 세계 어디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또한 우리 기업들의 기부 참여도 주목해볼 만하다. 계속되는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국내 30대 그룹들이 운영하고 있는 26개 공익재단들은 공익사업에 전년 대비 20.4% 늘어난 2700억원을 지출했다. 심지어 일부 공익재단들은 수입 감소에도 불구하고 공익사업 지출을 전년 대비 2~3배 이상 늘렸고, 절반에 가까운 12개 재단이 100% 이상 늘렸다.

 이제 이러한 기부 참여의 움직임을 연말 또는 아이스버킷과 같은 열풍 속에 한 번 이루어지는 ‘이벤트 기부’가 아닌 ‘일상 속에 기부’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기부의 위대한 힘’ 앞에 ‘기부 불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관련한 법과 제도를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통 큰 용기를 내길 바란다.

원혜영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