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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을 묵상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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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정재숙
정재숙 기자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정재숙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요즘 상가에서 삼가야 할 인사말이 호상(好喪)이 아닌가 싶다. 오래 살고 행복하게 지내다 가는 기준이 많이 달라져서 하는 얘기다. 100세 장수 시대에 도대체 몇 살에 어떻게 죽어야 호상의 범주에 드는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호상의 반대편에 참상(慘喪)이 있다. 젊어 죽은 이의 장례를 이름이다. 이 또한 기준 정하기가 애매하다. 오래 살게 됐다는데 참상은 늘어난다. 자살률이 날로 높아지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사고사와 변사(變死)가 끊이지를 않는다. 전쟁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내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퍽퍽 죽어 넘어지는지 아뜩해질 때가 있다.

 며칠 전 타계한 한국 문화기획자 1세대 강준혁(1947~2014) 선생의 죽음 또한 그러했다. 사심 없이 한국 문화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져 일으켜 세웠던 그는 예순일곱, 한창 일할 나이에 갑작스레 눈을 감았다. 고인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본 듯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참상의 문제를 다룬 유고(遺稿) 한 편을 남겼다. 한마디, 한 구절이 다 절절해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준 유언이 아닌가 싶다.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들은 우리를 깊게 생각게 만들기도 하고 또 반성하게도 한다. 이러한 많은 죽음들이 던지는 메시지들을 우리는 유심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들을 바로 해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글은 강준혁 선생이 지난 2월 세상을 버린 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를 애도하려 쓴 기고문이었다. 연구비 횡령 혐의로 검찰을 드나들다 ‘내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제주 바다에 몸을 던진 이 교수의 죽음을 선생은 사회적 타살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대형 연구 프로젝트 수행기관으로 전락한 대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회계 오류를 뒤집어 쓴 이 교수를 범죄인 취급한 무고였다.

두 사람은 선생이 10년에 걸친 공간사랑 극장장 일을 마무리한 뒤 서울 대학로에 ‘스튜디오 메타’라는 문화연구소를 낼 때 의기투합했던 선후배 사이였다. 장례식장에 모인 후학들은 급작스런 강준혁 선생의 죽음이 고(故) 이 교수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고 짐작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이 던지는 메시지를 옳게 해석하고 반성하고 있는가. 나날이 의구심만 늘어갈 뿐이다. 선생은 이 질문에 대한 뼈아픈 각성과 대답을 촉구했다. 멀리는 한국 전쟁으로부터 가까이는 세월호 참사까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왜곡과 얼버무림으로 거듭 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지역 간 갈등의 벽을 철없는 정치가들이 자기 무리를 모으기 위해 다시 세우는 모습을 우리는 빤히 보고만 있었을 뿐 아니라 동조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쓰 잘 데 없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피를 나눈 우리 형제들의 가슴에 총칼을 서로 들이대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신념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강준혁 선생은 문화에서 창조 에너지와 공익 정신을 유독 강조했다. 이론을 앞세운 외국 유학파와 달리 이 땅이 길러낸 예술가와 현장의 힘을 업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했다. 한국 건축계에 공동선(共同善) 개념을 불어넣은 이종호 교수와 뜻이 통해 통일 시대 이후를 내다본 문화 청사진을 넓게 그리고 있었다.

강 선생은 사석에서 요즈음 한국 사회에 자기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우겨대는 사람들이 늘어나 쓸데없는 갈등과 에너지 낭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고 걱정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통일을 맞이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를는지 몸서리쳐진다고도 했다.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이 잇따르는 사회는 구성원을 환자로 만드는 암(癌) 병동과 같다. 양보 없는 주장과 편협한 생각들이 국민을 시한부 생명으로 내몰고 있다.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가야 하는 나날이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호상보다 참상이 늘어나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강 선생이 남긴 메시지를 거듭 묵상해야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

정재숙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