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루스의 비행-강능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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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한수 자네 부인은 아직도 자네가 돌아와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네.
조민기 끝났어! 우리들의 관계는 그날로써 끝났어. 아니, 모든 것들과의 상호관계는 그날로써 끝났어. 꽃무늬 벽지에는 금새 핏방울이 맺히고 살을 썩어 들어가게 하는 목기가 사방에서 내게로 몰려왔어. 그녀는 그 속에서 뒤척거리고, 난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에 못 이겨 그 곳을 빠져 나왔지. 그날 이 방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난 거리에서 죽었을 거야. 자! 자네도 한잔하지.(술을 권한다).
김한수 자네가 이 방을 얻을 때는 주인 영감에게 화실로 쓴다고 했다더군. 그런데 그 영감말이 자네가 그럼 그리는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고 캔버스 위에다 잉크병을 던지거나 칼을 던지거나 하는 것을 두세번 본 일밖에 없다고 하더군.
조민기 그렇게라도 그리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군.
김한수 자네 언제부터 그림에 취미가 있어서 화실까지 차리려고 했나?
조민기 그냥 꾸며낸 거짓말일 뿐이야. 나도 모르게 영감을 만나니 그런 거짓말이 술술 나오더군. 사실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내가 세상을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긴 했지. 안정된 평화, 깊은 침묵, 그리고 날카로운 변화, 그러나 가까이서 그려서는 안되지. 붓이 스쳐간 자국이 보이면 조각된 위선이 날 메스껍게 만든단 말이야 .될 수 있으면 멀리, 멀리서 관조하면 그나마 그림은 그 행위의 가치가 인정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지.
김한수 자대 무인은 자네가 오래 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고 하더군.
조민기(웃음을 띠고) 거짓말 말아. 난 아내 새에게 그런 내색도 한 적이 없고 그런 생각조차 먹어 본 일이 없어. 그저 이곳에 온 뒤로 무언가 하지 않으면 못견디겠기에 조금씩 손을 댔을 뿐이야. 그 뿐이야. 그녀는 나에게 미소를 보내며 동시에 날 배반해 왔어. 그녀는 고통과 번민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에 곱게 빗질한 그녀의 머리카락과 적당히 교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 그녀는 만들어진 그대로야. 아무리 가꾸어 봐야 조금도 변화하지 앓아. 그것이 내 가슴을 좀 먹어 들어가게 하는 곰팡이 역할을 훌륭히 해 냈지. 그녀는 자기에게 내 마음을 의지하라고 슬픈 미소를 띠었지만, 장미나무에 등을 기대는 격이나 마찬가지였지.
김한수 기대지 말고 향기를 맡으면 되잖나?
조민기 향기?
김한수 그래. 모든 것을 사람으로 인정하고 다시 만나보면 어떨까? 적어도 자네 부인새 만큼은 말이야.
조민기 그녀는 나 때문에 미치진 않지만 난 그녀 때문에 미치고 말아.
김한수 자네 부인은 지금 절망상태에 빠져있네. 그것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자네의 기약없는 외출 때문이라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나?
조민기 절망은 그 여자 개인의 가슴속에서 생겨났겠지. 하지만 그 구제는 나에 의해서는 불가능해. 오직 외부의 단절에 의해서만 그 회복이 가능할 뿐이야. 절망은 몸부림칠수록 회복되기는커녕 더 깊은 늪 속으로 짜져 물어가고 말아 그리고 문제는 나 역시 원망 상태에 빠져 있거든. 그리고 그녀는 나의 희미한 잔상이야. 그래서 더욱 지워버리고 싶은 거야. (사이) 혹시 그녀를 만나거든 종교를 가지라고 말해 쥐. 종교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힘은 비교적 단결된 편이니까.(술을 마신다)
김한수 이봐, 절망에 빠진 자네를 인정하고 자네의 그 숭고한 경신의 질주를 인정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질주를 인정한다면 자네도 그의 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되지 않는가? 그리고 자네도 그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고.
조민기(웃으며) 자네, 슬금슬금 본색을 드러내는구먼. 관조하는 자의 간지러운 쾌감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평화의 사신으로 날아온 얄미운 사기꾼이었구먼.
김한수 하지만 난 그런 의도가 아냐. 난 다만….
조민기 알고 있어. 누구나 그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게 마련이지. 어딘가엔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자체는 부정할 수 없지. 하지만 파도의 리듬처럼 단조롭고 영원히 지속되는 내 사고의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조그만 내 역사의 바퀴야. 그러니 더 이상 내 영혼의 허점을 발견하려고 기웃기웃 살필 필요 없어. 차라리 구경꾼의 재미를 맛보는 편이 나을걸세. (사이)난 자네가 취해서 비틀비틀 하는 것을 좀보고 싶은데 자넨 왜 취하지도 않는 거야! 취하면 취할수록 또록또록 명료해지는 내 이 꼴통이 보기 싫어 죽겠는데 자네마저 그렇게 새록새록 눈알을 굴리며 날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불쾌한 시간을 서로서로 나눠주며 꾸역꾸역 삼키고있는 셈이 된단 말이야. 자! 그련 괴상한 의미에서 한잔하자구. (김한수, 웃으며 술을 따라 마신다) -
김한수 자넨 꽤 한적한 시골로 가지 않고 자네 말대로 악취 풍기는 이 도시에서 서성대고 있는 건가?
조민기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하지. 시골은 어디에나 평화가 깃들어 있지. 녹색의 싱그러운 바람이 돌관 위에 몰려다니고, 온갖 종류의 새들이 다이어먼드 빛 투명한 공기 속을 마음껏 떠돌아다니지. 그 곳에는 완전한 자유와 진정한 사망만이 있을 뿐이야. 그 곳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아.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불시에 용해되어 없어져 버리지. 진정한 구원은 악의 구렁텅이에서만 가능해 내가 시골로 갔더라면 마치 태양 앞에 벌거벗은 얼음 조각처럼 스르륵 녹아 없어져 버렸을 거란 말이야.
내 존재는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가 돼버린단 말이야. 난 악취 풍기는 이 도시에 남아서 천사쉐의 손길을 기다려야해.
김한수 천사쉐가 자네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여겨 보고있을까?
조민기 물론이지. 그리고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난 벌써부터 느끼고 있어. 천사는 내게 여러 가지 선물을 줬어.
검은 새가 있고 검은 태양이 있는 한 폭의 풍경화, 그리고 이 방, 이 방은 적막한 숲 속에 자리잡은 조그만 연못이야. 천사는 이곳에서 마음껏 휴식하도록 내게 허락해 줬어.
이 방에서 내 영혼은 녹색의 부드러운 나태를 줄기고 있지. 그리고 검정 빌로도 수건으로 온 몸을 감싸고 사방을 둘러보면 여기 펼쳐져 있는 온갖 것들은 저마다 몽상가인양 나른한 자태로 그들 나름대로의 휴식을 즐기고있지.
그리고 조용한 감각의 흔들림 속에 이곳 온실은 이름 모를 열매를 키우고 있어. 인생이 부풀은 행복이라 할지라도 난 이곳에서 그것과는 무관한 지고의 쾌락을 즐기고 있다구.
김한수 햐아. 나도 그런 천사 한분 알았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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