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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사오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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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오정이 오토바이 뒷좌석에 여자친구를 태우고 질주하고 있었다. 너무 빨리 달리자 겁에 질린 여자친구가 사오정에게 소리쳤다. "좀 천천히 달려. 무서워. "사오정이 고개를 돌리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널 사랑해!"

몇년 전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의 초창기 버전이다. 썰렁하게 오가는 동문서답에 풍자와 패러독스가 스며들어 있다. 이 유머 시리즈는 허영만 원작의 TV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에 등장하는 가는귀 먹은 사오정의 이미지에서 유래한 듯하다.

1990년 김수철의 경쾌한 주제가와 함께 처음 전파를 탄 '날아라…'는 우리 TV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에 속한다. 서유기를 원안으로 하는 만화나 TV 애니메이션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쓰카 오사무(手塚治蟲)에서 비롯됐다.

데쓰카의 출판만화 '나의 손오공'의 애니메이션판 '오공의 대모험'이 후지TV에서 방영된 것이 1967년이다. 이후 많은 작가가 다투어 서유기를 각색했고, 도리야마 아키라(鳥山明) 원작의 유명한 '드래곤 볼'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현대 청소년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준 서유기가 소설 형태로 처음 자리잡은 중국 명나라 세종(가정제.1507~1566)대는 거꾸로 숨막히는 공포정치 시대였다. 세종은 도교에 빠져 궁중에 커다란 제단을 만들어 놓고 도교의식을 일삼았다.

총애하던 고양이가 죽자 금으로 만든 관에 넣어 만세산 기슭에 묻었으며, 대학사를 시켜 추도문을 지어 바쳤다. 세종은 불로장생약에 탐닉하다가 결국 금단 증상으로 숨졌다.

이 시기엔 또 동창(東廠).서창(西廠).내행창(內行廠).은의위(銀衣衛) 등 특무기관들의 정탐과 음해, 무차별 고문이 혹심했다. 산 사람의 피부를 벗긴 뒤 그 안에 잡초를 넣고 꿰매 인형을 만들어 전시하는 박피(剝皮)라는 잔혹한 형벌도 시행됐다.

중국어 번역가 임홍빈(任弘彬)씨가 4년간 공들인 끝에 제대로 된 서유기 완역본을 완성했다(본지 4월 17일자 20면). 任씨가 본 서유기 속의 사오정은 '고지식하고 꽉 막힌 원칙주의자'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4년 동안 마치 기계 같은 정확성으로 작업에 열중해 한자 86만6천자를 우리말로 옮겨 낸 任씨야말로 '위대한 사오정'이다. 지신(知新) 바람에 밀려 온고(溫故)는 뒷전에 팽개쳐진 듯한 요즘이기에 그의 노고가 더욱 돋보인다.

노재현 국제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