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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신청 27일만에…터키 국경 통해 노숙하며 강행군 42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이란」과 「터키」와의 국경촌「바자르간」은 지도에는 없는 땅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육로 수송의 통과지점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난달22일 이래 「이란」내의 공항이 폐쇄되면서 이곳은 「이란」과 외부 세계를 잇는 두 관문중의하나가 되었다.
기자는 지난 20일 이곳을 통과했다.
통과 차량수가 평소의 여러 배로 불어나 있어서 입국절차를 밟는데 짧게는 3시간 길게는 7시간이 걸린다. 「터키」의 변경도시 「에르주룸」을 떠나 중앙「아시아」의 나무하나 없는 산악지대 협곡을 5시간 달려 기자가 탄「버스」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이날 하오1시였다.
국경양쪽에는 통관을 기다리는 동·서구 국적의 화물 「트레일러」와 「버스」1백여대가 긴 행렬을 이루고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관리소 건물은 판문점 회의실을 연상케 했다. 중앙「홀」을 가로질러 서쪽이 「터키」고 동쪽이 「이란」이다. 「터키」쪽은 벽과 기둥이 「핑크」색 「페인트」칠을 한 이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데 비해 「이란」쪽은 회색「페인트」칠을 한 벽 위에 혁명구호와「호메이니」사진 그리고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니고 오로지 「이슬람」공화국』, 『미국은 우리를 파괴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혁명을 파괴하지는 못 할 것이다』라는 등 「호메이니」의 구호가 무질서하게 붙어 있었다.
「터키」출국 절차를 마쳤을 때는 이미 하오5시30분. 「이란」쪽 세관에서는 모두 퇴근을 했기 때문에 보세 구역 안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기온이 영상 3도 정도였지만 노숙을 하는데는 영하보다 더 추운 느낌이었다. 관리들이 주는 두 장의 검은색 담요를 몸에 두르고 통관 검사대의 차가운 「테이블」위에 누워있으니 아래로부터 냉기가 온 몸을 엄습해왔다.
고국의 온돌방의 절묘한 난방 방법이 그처럼 오묘하게 그리고 그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잠으로 추위를 잊어 버리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지만 노력으로 안되는게 잠이었다. 결국 추위를 견디지 못해 같이 타고 온 「이란」사람 40여명과 함께 서서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밤10시쯤 초소의 남쪽 야산 너머에서 10여 발의 박격포 소리와 간간이 기관총 소리가 1시간동안 들렸다.
동행했던 「이란」학생은 그것이 「쿠르드」족 반란군과 정부군간의 교전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으로 주로 「터키」족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그 말에 신빙성은 적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이란」정부는 3일전 「쿠르드」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후에 정부쪽에서도 확인이 되지 않았다. 「이란」공보성은 기자가 이곳을 통과하던 날 이 일대에 대해 외국기자의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국경에서 「테헤란」까지의 거리는 9백㎞이지만 주행시간은 24시간이나 걸렸다.
중간에 「이란」제2의 정유공장이 있는 「타브리즈」가 위치해 있어서 공습경보로 지체되기도 하고 연료공급이 배급제로 여의치 않아서 도중에 여러 번 주유를 해야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도시에서는 저녁 6시부터 실시되는 등화관제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도로상의 차량은 「테헤란」근교에 접근할 때까지는 「라이트」를 켜고 주행했다. 완전 소등이된 도시들을 지나는 것은 생명이 없는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이란」에서는 공습경보 「사이렌」을 「라디오」로 방송하기 때문에 차안의 「이란」사람들은 줄곧 「라디오」를 켜놓고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런던」서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하는 「이란」학생과 「테헤란」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대표부에 소속한다는 중년남자가 같이 타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영어를 잘해서 이들의 통역으로 기자도 「라디오」·「뉴스」를 계속 들었다.
학생은 현 정부에 비판적이고 PLO대표는 적극 지지파여서 「뉴스」통역에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 배경 설명은 아주 정반대였다. 그래서 오히려 기자로서는 더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기자가 암흑 속의 「테헤란」에 도착한 것은 22일 새벽2시. 「비자」를 신청한지 27일만에 평화의 마지막 기착지 「에르주룸」을 떠난 뒤 42시간 동안의 고통스럽고 때로 좌절감으로 미칠 듯 했던 여행,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저널리스트」로서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체험으로 가득찬 이 대륙간 육로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여행동안 한가족처럼 친해진 「이란」사람들은 『제발 우리 쪽 입장을 외부 세계에 잘 알려 달라』고 당부하고는 『호다 하페즈』(「페르시아」어로 『안녕』이라는 뜻)라며 악수를 청해 왔다. <장두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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