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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나는 출발인사차 경무대(현청와대)를 방문했다. 은행권문제가 거론되자 이리승만대롱령은 일언지하에 교환율은 1대1로 해야된다고 단언했다. 나는 북한주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남북쌍방 물가비율에 따라 교환율을 정해야 된다고 생각했다.남북분단이전의 물가를 기준으로 남북의 물가수준을 비교한 결과 6대1, 즉 남의 6원에 대해 북은 1원이 타당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6대1을 진언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으나 이대통령은 내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1대l을 주장했던 것이다.
평양에서 한국은행권의 통용력을 시험하기 위해 물건을 사 보았다. 군말 없이 냉큼 받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환영까지 했다. 한국은행권은 군용통화로 군대의 손을 거쳐 이미 북한땅에서 일부가 유통되었고 대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이대통령은 또 내가 평양으로 떠날때 은밀히 다녀오도록 분부했다. 당시 「유엔」군은 북한지역에 대해 군정을 실시했는데 이북수복지역은 의당 대한민국관할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대통령은 이것이 못마땅했다. 10월12일 조병왕내무부장관은 북한시정방침을 밝히고 정부의 행정요원도 파견했으나 「유엔」군측은 군정실시 방침을 변경하지 않았다. 다만 통화문제에 대해서는 「유엔」군측이 손을 대지 못했고 또 현실적으로 한국은행권을 군용통화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통화문제만은 우리 정부측에서 선수를 치자는 것이 이대롱령의 속셈이었다.
그런대 우리는 평양에 가서 중앙은행을 지키고 있던 미국군인들과 기념사진올 찍은 일어 있었다.
이 사진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은행 총재와 평양지점장이 북한의 중앙은행을 시찰했다는「타이틀」과 함께 미군기관지인「성조지」에 게재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대통령 눈에 띄었으니 무사할 수가 없었다.
기껏 은밀히 다녀오라고 일렀더니 광고까지하고 다녔다고 야단을 맞았던 것이다.
평양에서 당시 평양지구 헌병대장이었던 김종원대령(작고)을 만났다. 김대령은 남포제철소에 있던 금괴를 인천으로 후송했다고 우리에게 자랑했다. 이 금괴는 재련 도중에 있던것을 남겨놓고 도망친 것인데 1ㆍ4후퇴후 부산에서 한국은행에 현물이 들어왔다. 꽤 큰금괴였다. 국가에 귀속되어 재련을 끝마친 다음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했다. 평양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가운데에 능라도에서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빈집이 한채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방문을 열어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도배지ㆍ반자지가 아니라 온통 「노동신문」으로 도배, 반자를 발라놓았는데 특히 아무개만세 무슨만세하는 대문짝만한 활자의 만세구호가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광경을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함을 아니 느낄수가 없었다.
평양의 화신백화점과 경찰서지하실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볼 참상을 목격했다. 국군이 평양에 입성할때 이를 환영한다고 너무 빨리 거리에 뛰쳐나온 젊은 남녀학생들을 공산도당은 두 건물 지하실에 가두어넣고 불을 지른 다음 출입구를 봉해버렸다는 것이다.
평양에 남아있던 그곳 중앙은행 직원과 점심을 같이했다. 북한지역에서 한국은행권을 발행하자면 북한의 은행권발행액을 파악해야 되겠는데 도무지알 도리가 없었다. 은행권은「모스크바」에서 인쇄했다는데 그것이 북한의 중앙은행뿐만 아니라 북한주재 소련대사관으로도 공급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에서 발행되는 은행권 말고도 소련대사관에서 정보비로 뿌려지는 것이 있고, 또 소련은행인 극동은행의 자금으로도 둔갑을 하는 모양이어서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중앙은행발행액만이라도 숫자가 있음직한데 극비사항에 속해서 그랬던지 남아있는 중앙은행직원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끝내 은행권발행액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점심을 먹으면서 입에 댄「카바이트」술로 인해서 나는 평양에서 큰 고통을 치르게 되었다. 술이라고는「카바이트」로 만든 술밖에 없다는 것이다. 코를 찌르는 냄새부터가 역해서 아예 입에 받지 않았지만 평양직원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마실수도 없어서 대접삼아 조금 입에만 댔던 것인데 이것이 탈을 일으켰다.
그날 저녁 서울에서 동행한 안씨 주선으로 당시평양에 있던 우리 군관민요인들이 평양의 옛날부자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서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나는 낮의 「카바이트」 술 까닭으로 복통이 심해 겨우 참적자들에게 박총지배인을 피하자 실례를 무릎쓰고 누워버렸다. 급기야는 한방중에 안씨가 헌병 보호아래 약을 지어오는 소동을 벌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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