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1) 월남은 사실상 자멸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973년3월 하순 중부 월남의 심장부 「다낭」시가 북월군에 의해 함락되기 조금 전에 「티우」 대통령은 「사이공」에 있는 야당 지도자들과 비밀 접촉을 하여 반공 세력을 총망라한 거국 내각을 만들어 후방의 단결을 과시하고 일선 장병들의 사기를 올려 북월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전세를 역전시켜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티우」의 제안은 반공 지도자들이 이 어려운 국가 존망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가기 위해 무조건의 단합이었고 사리사욕의 배제였다.
그러나 야당 지도자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은 우선 「찬·티엔·키엠」 수상을 제거하고 대통령실 안보 담당 특별 보좌관 「당·반쾅」 중장을 독립궁에서 쫓아내고 그밖의 몇몇 친여 정치인들을 제거해버려야만 입각할 수 있으며 또한 자기들이 원하는 수상직이나 내부 장관직 같은 좋은 자리를 주어야만 입각하겠다고 주장했다. 조건 없이 한데 뭉치자는데 누구 누구를 제거하고 또 자기들이 원하는 감투를 달라는 조건을 제시하니 일이 잘 될리가 없었다.
이 정치 지도자들의 상호 질투와 높은 벼슬에의 야심은 무너져 가는 월남군의 사기를 올려주고 전투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최후의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거국 내각 성립에 실패한 후 월남군의 사기는 더욱 땅에 떨어져 눈사태 붕괴 현상을 가속시켰으며 「티우」는 하야하고 자유 월남국은 패망의 날을 맞이했다.
이렇듯 월남 패망의 첫째 원인은 반공 세력의 분열이었다. 그 다음의 패망 원인은 「베트콩」의 효율적인 활동이었다.
1962년2월26일 남부 월남의 공산주의자와 친공분자들은 「캄」월 국경 부근에 있는 「캄보디아」 영토 내에서 남부 월남 민족 해방 전선을 결성하고 「웬후토」를 해방 전선 중앙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웬후토」는 l910년에 「사이공」「촐롱」에서 태어나 22세 때 「프랑스」 대학에서 법과를 졸업하고 「사이공」에 돌아와 변호사 개업을 하다가 1946년부터 좌익 운동에 가담, 여러번 투옥되었다가 l961년에 「튀호아」 형무소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탈옥, 그 길로「캄보디아」 국경 지대로 도주한 사람이었다.
남부 월남 민족 해방 전선 (베트콩)은 「웬후토」를 수령으로 하여 1962년2월26일부터 l5일간의 긴 회의를 연후 14개의 강령을 채택하고 민족 해방 전략을 수립했다. 「베트콩」의 민족 해방 전략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제1단계=조직
제2단계=민중 봉기
제3단계=민중 무장화, 적군사력 파괴, 최후의 승리 (혁명 완수).
조직은 사회 각계 각층에 비밀리에 침투하여 점 조직을 하고 확대해나가는 것이었다. 이 조직을 통해서 사회 여러가지 이질적 요소를, 인간의 질투와 야심에 결부시켜 개발하여 사회 불안을 조성, 민중 봉기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 민중 봉기의 서곡은 「데모」다. 「데모」는 최초에 평화적으로 하다가 가열시켜 폭력「데모」로 발전시킨다. 「데모」 부대로는 학생들과 종교 세력이 많이 이용된다.
치안이 마비되면 봉기한 민중에게 무기를 주어 무장화하여 북월군과 협동하여 적 (남월 정부군) 군사 부대를 공격, 섬멸하여 해방 전략 목표를 달성하고 민족 해방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베트콩」 해방 전략은 효율적으로 잘 수행되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l967년9월3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11명의 입후보자 중 「티우」 대통령 다음으로 많은 득표를 한 「충딘·주」가 「베트공」의 「푸락치」였다는 것이 뒤늦게 1978년에 판명되었다.
그는 「사이공」 함락 후 반공주의자를 가장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월공 정권의 비밀 지령 하에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미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재판에서 실형 선고를 받고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있다.
「사이공」 대학교 총 학생장으로서 「티우」 정권을 약화시키고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그 많은 「데모」를 주동한 「힌탐만」도 「베트콩」 「푸락치」였다는 것이 「사이공」 함락 후에 판명되었다. 1976년 그는 월공의 인민대의원 (국회의원)이 되었다. 호전적인 「안쾅」계 「틱트리·쾅」 스님의 참모장 격으로 「사이공」 거리를 휩쓰는 사나운 「데모」대의 앞에 서서 「아오자이」를 바람에 휘날리며 민주화·자율화를 외치며 행진하던 여자 국회의원 「몽투」도 「베트콩」 「푸락치」였다는 것이 「사이공」 함락 후 밝혀졌다. 그도 1976면에 월공 인민대의원이 되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수없이 많은 「베트콩」 「푸락치」가 각계 각층 어느 곳에나 침투하여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사리사욕에 집착하는 정치인, 종교인들과 이리저리 손을 잡고 이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월남군 사기를 떨어뜨리며, 자기들의 해방 전략 목표 달성을 위해 착실히 전진하고 있었다.
월남 패망의 세쨋번 원인은 부정 부패였다. 월남에는 「프랑스」 식민 시대부터 4가지 사회악, 뇌물·도박·아편·매음이 있었다.
「고·딘·디엠」 대통령은 이 사회악 근절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는 날이 갈수록 사회악은 쇠퇴하여 잠적하는 듯이 보이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뿌리박은 사회악은 그 뿌리가 완전히 뽑히지는 않은 채 지하에 남아 있었다.
결백하고 강력한 지도자 「고·딘·디엠」 대통령이 1963년11월1일 쓰러지고 약체 정권인 「두옹·반·민」 정권이 들어섰지만 이 정권은 불과 3개월만에 쓰러지고, 그후 계속해서 정변이 일어나 사회 혼란이 오자 지하에서 잠자고 있던 사회악의 뿌리에서는 새싹이 돋아 점차 무성하게 번져 사회악은 「고·딘·디엠」 정권 이전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