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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어」는 15대7… 뒷맛쓴 무소속쟁탈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공화당과 신민당의 무소속의원 쟁탈전은 15대7로 숫자상 공화당쪽에 유리하게 끝났으나 과정에
서는 기선을 잡은 신민당이 판정승.
당초 9명에서 11명까지로 예측되던 신민당의 영입작전은 뒤늦게 「미친×춤추듯」(박권흠 신민
당임시대변인의말)달려든 공화당의 반격으로 인해 임호·변정일두의원이 입당일보전에서 돌아서
버렸고 최후 순간까지 망설이던 함종윤·박용기의원 역시「솔개가 병아리채가듯」공화당이 입당
시켰다.
공화당은 야당이 먼저「민정회」를 깨고 무소속의원들은「독식」하려해서「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수단으로 뒤쫓아간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민당에서는 입당성명까지낸 국회의원의
발길을 되돌려 빼앗아간 것은 비인도적일뿐아니라 본인들의 정치생명에 큰 손상을 끼친 정치신의
의 문제라고 비판하고 있다.
김영삼체제의 첫 소산이라할 무소속의원의 양분은 원내세력의 양극화를 가져왔고 이것은 앞으
로의 정국에 난기류를 예보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솔개가 병아리 나꿔채듯>
신민당이 무소속의원을 먼저 끌어들이게 된 것은 그 발단이 10대국회초에 빚어진「백두진의장
파동」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투표에 참석치 않은「민정회」소 속의 예춘호 한병송 오세응 임호 박용기의원등은 몇차례
만나는 동안 여당도 야당도 다 마음에 들지않는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신당을 만든다는 문제까
지 논의하기에 이르렀고 이를위해「신당문제연구소」를 먼저 차리기로 합의했다.
한·임·박의원은 사무실을 구하기위해 우중을 뛰어 다니는 열성을 보였고 박의원은 자금까지
댈 뜻을 비쳤다는 것.
박의원은 집이 전주에 있다는 점을 들어 장차 전주에서 출마해 이철승씨와 대결해 보겠다고 할
정도로 의욕을 보였다.
김영삼씨가 당권을 잡게되면 이같은 신당운동을 재고하기로 했고 김씨가 총재로 당선되자「입
당」으로 급선회했다는 얘기.
박찬·오세응의원은 처음 한의원과 셋이 먼저 입당하자고 했으나 한의원이 다른 친야의원들과
행동통일을 하자고 제의해서 집단입당으로 발전했다.

<당론뒤바꾼 두가지이유>
공화당이 공휴일(현충일)을 틈타「무소속 영입불고」의 당론을 1백80도 급선회시킨 것은 두가
지 정치적 우려때문.
첫째 우려는 신민당의석이 3분의 1선을 넘을수도 있다는것이고 둘째 우려는 야당기세가 여론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것.
공화당주장으로는 신민당이 잔여무소속의원들중 이후낙·권오태의원을 제외한 거의 전부에게
입당 교섭을 벌였다는 것이다.
사실 공화당의 적극적인 방어작전까지만해도 신민당의석은 기존 61석에다가 무소속 입당자 7
명, 입당서명자2명(임호·변정일의원)을 합쳐 70명이 확보된 셈이었고 여기에 통일당과 합당해서
3명을 추가한다면「위험수립」에 육박한다는 계산과 우려가 나타났다.
따라서 공화당의 전격적인 무소속입당조치는 신민당을 능가하는 의석확보의 숫자놀음보다는 77
석 이상을 향한 야당의 포섭대상을 원칙적으로 말소시키자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5일 열렸던 공화당당무회의에서 박준규당의장서리는 입당계획을 꺼내지는 않았지만『무소속을
입당시킨다면 선택적영입이 아닌 전원영입이 될것』이라고 비쳤다는 것이 뒤에 알려졌다.
끌어들이기로 작심한 시기에 관해 박의장서리의 측근은『당무회의 전날밤에 결심을 굳혔고 윗
분의 의중타진을 끝낸 것은 6일하오였다』고 설명했다.
박총재는 이 문제에관해 공화당이 영입원칙을 정했다면 그렇게 추진할 것이며 옹졸하게 과거원
칙에 얽매일 것은 없다고 했다는 뒷얘기.

<하찮은생각이 대사망쳐>
임호·변정일두의원의 신민입당결정→잠적→번의→공화입당은『타의가 아니라면 전천후변절행
위』라는 것이 신민당의 반응.
변의원을 입당「그룹」에 소개한 사람은 오세응의원.
오의원이 입당을 망설이던 변의원에게『이번 기회를 놓치면「찌꺼기」가 되어 공화당에 가려도
싸게 팔린다』면서 신민당입당을 권유하자 변의원은 야당에 참가할 결심을 보이고 한병송의원에
게 입당의사를 표명했다는 것.
한의원은『정치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니 남의 권유에 따르지 말고 스스로 결정해야 한
다』며 재고할 것을 충고했는데 입당성명서에 서명하기 직전에 변의원이 나타나 가담할 것을 재
차 확인하고 서명했다는 얘기.
이때 오세응의원이 입당원서를 따로 준비해와 즉석에서 쓰라고하니까 어느의원이『입당성명서
에 서명하면됐지 입당원서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해 일제히 거두려던 입당원서를
각자에게 나누어주고 다음날 마포당사에서 있을 공동기자회견때 가지고 나오기로했었다.
김영삼총재는 이들의 이탈을『말기적 증상』이라고 했지만 다른의원은『국민앞에서 뚜렷한 소
신을 못밝힌다면 차라리 정치를 폐업하는 것이 낫다』고 비판.

<1구2의원 케이스는10곳>
무더기 무소속입당으로 공화당은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 지역구 관리와 영입의원예우문제등
더 큰불을 앞에 놓고있는 셈.
15명의 입당의원 때문에 1구2의원이 되는 지역구가 10개나 생겼고 이중 6개 지역구에서는 출신
구까지가 동일.
△김효영·김진만=삼보 △김용태·임호=대전 △김봉호·임영득=해남 △신동막·최치환=남해
△현오봉·변종일=남제주등.
지역구활동을 하다가 8일 중앙당사에 나타난 김봉호의원은『무소속영입원칙에 따라 임영득의원
이 입당하게 됐으니 양해해달라는 신동식총장의 전화를 받았다』고 하면서도『임의원이 선거때
공화당을 비난한 내용을 녹음「테이프」로 보관하고 있는데 그와 지구당을 공동관리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흥분.
공화당간부들로부터 개별적인 입당교섭을 받는 과정에서 함종윤·변정일의원등은 지구당관리권
에대해 언질을 요구했고 권오태의원같은 이는 국회상임위를 건설위에서 내무위로 옮겨야겠다는등
조건을 제시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대해 공화당측은『공화당의 재공천율은 40여%에 불과하니 지구당을 독점한 의원이라도 엄
격히 말해 다음 공천보장은 없는 것이 아니냐』『지구당개편대회는 이미 끝났기 때문에 당분간은
백의종군이 불가피하다』는 말로 가라앉혔다.
윤재명의원은『정치이념에 좇아 복당하는 마당에 구차스럽게 지구당 문제를 거론할 수 있느
냐』고 했고 박정수의원은 같이 입당한 정휘동의원과 만나 김천과 상주를 나누어 관리하자는「조
경금지협약」에 가조인.
그러나 신동식사무총장·구범모당무조정실장등은『앞으로 많은 난제가 발생할것』이라고 인정
하면서도 『이런 어려움은 당내에서 잘 여과할수있을것』이라고 일단은 여유를 보이고 있다.
최다선인 김진만의원에게 당상의역을, 4선의 최치환의원과 이후낙전민정회회장에게는 당무위원
을, 3선의 윤재명의원과 민정회총무를 지낸 권오태의원(2선)에게는 국회상임위원장급의 예우를 공
화당이 고려하지 않겠느냐는 추측도 있다. <한남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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