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497)제63화 민주당 시대(3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조각 비화>
첫 장면내각이 8월23일 발표될 때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나는 당시 신파 일을 잘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안가졌으나 나중에 신파 사람들한테서 조각에 얽힌 「에피소드」를 몇 토막 주워들었다.
제2공화국의 장관자리에 대한 매력은 오랜 야망생활로 일관해온 사람들에게 대단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최고위원을 지낸 박순천 여사는 문교장관 자리를 희망한 것인지 누가 추천한 것인지 얘기가 있었고 김상돈씨도 입각을 원했다.
그러나 조각본부에서는 국민적 인기와 행정책임자와는 별개로 취급해야한다는 원칙을 세웠던 것 같다. 내각명단에서 이름이 빠지자 이 두사람은 장 총리에게 탈당계를 냈다. 전후사정으로 보아 조각에서 소외 된데 대한 불만의 표시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 총리는 이를 극비리에 처리, 반려하고 말았다.
김선태씨는 나중에 무임소 장관이 되긴 했으나 처음 명단에 나오지 않자 불만이 대단했었다.
구파에서 M모씨는 상공장관을 하고 싶어 국회의원 몇 사람을 모아 운동을 벌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신각휴씨의 경우는 농림장관을 자천. 장 총리가 체신이나 보사부를 맡아달라고까지 했으나 본인이 수락치 않아 그럭저럭 넘어간 것으로 안다. 구파의 장관추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진산에게 매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 총리에게 직접 선을 댄 P모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중앙청총리실에서 마지막 각료 명단을 손질할 매 오위영 현석호 김영선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다고 한다.
나이가 연만한 신파의 L모 중진은 내각에 끼지 못한 것을 23일 새벽에 알았다. 즉시 중앙청으로 달려갔다. 장 총리나 참모들 생각엔 조직·설득 등에 탁월한 그에게 당쪽의 일을 부탁할 셈이었는데 그는 한사코 장관자리를 달라고 졸랐다. 새벽 3시까지 『6개월만 장관하고 그만 둘 거야』라고 1시간 이상을 조르는 바람에 장관자리가 그에게 떨어졌다.
문교장관에는 이날 새벽2시까지 유진오 고대총장을 교섭했다. 그러나 전씨가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는 사이 그럭저럭 넘어가 오천석씨에게로 돌아갔다는 후문.
무소속의 박제환 농림장관은 장 총리와 천수교회간의 연락·자금관계를 성실히 수행한 공로로 발탁된 것으로 안다.
국방을 맡겠다고 희망했던 신파 소장의 「리더」 이철승 의원은 노장참모들의 견제를 받아 끝내 좌절됐다. 이 의원은 발표직전에 자신이 빠진 것을 알고 전화로 항의했으나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김영선씨가 장관을 하는데 내가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했고 오위영 현석호 김영선씨 등 장 총리 측근 참모들이 『이철승이 시키면 「쿠데타」 할지 모른다』며 거부했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했다.
결국 국방자리는 장 총리가 가장 신뢰했던 현석호씨에게 맡겨졌다.
이철승씨에겐 3차 조각 땐가 보사를 맡아 달라는 교섭이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이 있고 본인도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자 김영선씨 등이 얼씨구나 하고 교섭을 철회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김영선씨와 이철승씨는 겉으로 같이 장 총리를 받치던 지주역할을 했지만 후계자 경쟁의식이 있어 은근히 그때부터 암투가 있었지 않나 여겨진다.
주요한씨와 김영선씨 사이에도 어느 자리를 맡느냐로 엎치락뒤치락 했다. 처음엔 주씨가 재무, 김씨가 복흥이었으나 발령직전에 바뀐 것 같다.
정일형 외무장관은 평소 「유엔」 문제 전문가로 명성이 있던 데다 민주당에서 계속 외교부장을 맡았었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다. 오위영 국무원사무처장관은 은행가 출신으로 신파의 재정·정치자금 「루트」를 관장했던 장 총리 측근.
현석호 국방은 평소 말이 적고 성실하며 자기 세력 형성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장 총리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김영선 재무는 장 박사를 부통령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보좌했던 선우종원 비서실장의 추천으로 장 총리의 측근 참모가 된 사람이다.
김씨는 정치에 능해서 정부차관자리에 가까운 사람을 상당수 앉힌 것으로 알려졌다.
내무장관에 맨 먼저 거론됐던 인물이 바로 구파의 유진산씨였다.
당시는 장 총리 주변의 드러난 참모들 말고 막후에 진짜 참모 한 두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는데 이들이 진산을 내무부장관 감으로 탐냈던 것이다.
이들은 신파 참모들이 대부분 관료출신으로 머리와 기능에 비해 배짱이나 소신이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하여 진산의 배짱을 사고 싶었던 모양이다. 4·19혁명직후라 정국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또 치안을 맡으려면 배짱 있는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구파를 붙잡아 매둔다는 것은 원내안정을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진산이 신파 내각에 개별 입각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이었다.<계속>【정성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