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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없는 이정표|나영균<이대교수·영문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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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올해가 지나면 만으로 따져도 50이다. 나이를 세는데 인색해보려는 노력조차 이젠 소용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공자처럼 10년마다 무슨 깨우침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긴 커녕 남 보기야 어쨌건 나 자신은 전혀 나일 먹어간다는 자각이 없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그러길 50년 되풀이했다해도 언제나 어제보다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내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랴. 또 한해가 지나가려는 지금 세월은 잘도 가는구나하는 감회는 실감이 나지만 내가 늙었구나는 생각도 안들려니와 무슨 슬기스러운 생각은 더군다나 떠오르지 않는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을 새삼 가져보려는 의도도 별로 없다.
지금의 나에겐 세월을 구획 짓는 것이 어떤 이름 있는 날도 아니요 특별한 달이나 요일도 아니라 어떤 경험의 내용인 것이다. 추석명절이나 정월 초하루보다는 기막히게 감동적인 연극을 보았다거나 뜻밖에 말이 맞아떨어지는 누구와 신나게 이야기했다거나 아니면 책을 읽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른 날들이 마치 거리를 표시하지 않은 이정표처럼 머리 속에 박혀있는 것이다.
그런 이정표들은 제정된 특별한 날짜와는 상관없는 데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기에 소중하고 치밀하다 가령 지난여름 영국 「스트래트포드」에서 있었던 일이 그렇다.
국제 「셰이스피어」협회에서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했던 나는 어느 날 「가든·파티」에 나갔다. 「셰익스피어」의 사위와 딸이 살았다는 그 집의 정원은 꽃밭이 그림처럼 아름다왔다. 몇 사람과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중키의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손을 내밀며 『난 「얀·코트」입니다』고 했다. 나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뻔했다.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익스피어」학자라서라기 보다 그러한 학자가 그렇게 순진한 웃음을 띠며 그렇게 소탈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 놀라와서였다.
얼마 안 되는 동안에 그와 주고받은 이야기에서 나는 따뜻한 마음과 날카로운 이성이 혼합된 그의 인품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또 지난가을엔 나의 『콘래드 연구』가 출판되었다. 그동안에 발표했던 논문과 새로 쓴 논문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든 것이 나로서는 가슴 부푸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이 책의 출판을 전후해서 부닥친 사람들의 온정이 나에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이정표가 되었다.
예술작품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조그만 수필집 하나를 내도 쓴 사람은 자연 남의 눈치를 살피게 마련이다. 그런데 『콘래드 연구』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시종 호의로 대해준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고 고마웠다. 출판되기까지의 과정에서도, 출판될 때에도, 그리고 출판되고 나서도 나로서는 뜻밖의 호의에 부딪치고는 흐뭇한 당혹을 되풀이하곤 했다. 호의는 사람에 따라 형태가 다른 것이었지만 자칫하면 주눅이 들려는 나의 마음을 북돋아 주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강풍 속에서 피신할 울타리를 만난 듯한 든든함을 느끼게 해주었으니 이것도 굵직한 이정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소중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람과 사람사이에 통하는 체온 같은 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결론이지만 그것을 얻을 때까지의 과정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신은 사랑의 추억을 의미한다』고 말해준 친구와의 대화도 나에겐 하나의 훌륭한 이정표다.
주름살이나 흰머리를 헤아려 무엇하며 지나간 시간이나 세월을 헤아려 무엇하겠는가. 헤아려 보람있는게 있다면 살아갈 용기가 솟아나게 해주는 크고 작은 이정표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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