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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미국의 소리」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4년이나 의친왕 기다린 「마거리트」|서울까지 찾아와 약혼반지 돌려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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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거리트양과의 사랑은 무르익어 갔어도 의친왕의 경제사정은 더욱 궁핍해졌다. 학비를 대주겠다던 경성황실에서도 일제의 침략앞에 왕실의 존망이 급한 판국이라 유학떠난 왕자를 제대로 돌아볼 여념이 없었다. 어쩌다가「워싱턴」의 공사관을 찾아가 몇푼 안되는 돈을 선대하기도 했으나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의친왕의 회고를 들어보면 당초 미국유학을 권유한 이는 영친왕의 모후 엄비였다는데 학비주선을 맡아주마던 비는 웬일인지 송금을 잘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1897년에 영친왕을 낳아 뒤에 순비로 봉해진 엄비는 운현궁의 의친왕을 찾아가 미국유학을 권유했다. 의친왕은 서구의 문물과 사상을 배워다가 쓰러져가는 왕실을 보전해야겠다는 결심으로 1899년 가을「언더우드」목사의 귀국행에 합류했다.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는 마침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6년간이나 미국에서 공부했으나 학위는 하지 않았으며 학비마저도 넉넉치 못하자 의친왕은 마침내 1905년에 귀국하고 말았다. 의친왕은 「마거리트」양에게『곧 돌아올테니 기다리라』고 한뒤 「워싱턴」공사관에 들러 여비를 마련, 「샌드란시스코」에서 귀국행 연락선에 올랐다. 연락선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화재를 만나 큰 소동이 벌어졌으나 그럭저럭「요코하마」에 도착했고, 배를 바꾸어 무사히 제물포에 도착했다. 의친왕은 태종에 있을때부터 그때까지 죽을 고비를 열네번이나 넘었다고하며 『무슨 팔자가 이렇게 센지 모르겠다』 고 한숨짓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곧 돌아오겠다는 왕자의 말씀만을 믿고 일편단심 30여년을 기다리던 「마거리트」양은 1934년4월 경성까지 찾아왔다.
마침 일본에서 「지찌부마루」(질부환)라는 호화여객선울 건조하여 벚꽃관광단을 모집했다. 「마거리트」양은 「샌프란시스코」에서 4백명의 관광객속에 끼어 동경으로 가관부연락선으로 조선땅에 닿아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마거리트」양은 「메시지」한장을 적어 의친왕에게 보냈다. 한시간도 못돼 의친왕이 조선「호텔」로 달려와 두연인은 감격적인 해후를 했다. 56세의 할머니가 된 「마거리트」양은 왕자가 34년전에 오른손 무명지에 끼워준 약혼반지를 내보이며 『저는 오로지 「프린스·리」가 돌아오시길 빌며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라고 했다. 「마거리트」양은 58세의 왕자에게 혹시 혼인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의친왕이 술하에 열다섯 자녀를 두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러실줄 알았다』며 반지를 빼내 돌러주는 것이었다. 「마거리트」양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굿바이』하면서 돌아섰다. 의친왕은 급히 손목을 잡으시면서 늙으막에 말동무라도하면서 함께 살자고 달랬다.
그러나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순진하게 자란 「마거리트」양은 『당신은 모든 부인들과 이혼할 수도 없으면서 34년이나 홀로 기다린 나에게 이제 부도덕한 생활을 하라는 말이냐』 고 뿌리치고, 그길로 귀국하고 말았다.
의친왕으로서는 30여년전 양녀와의 「로맨스」를 뒤늦게 일깨워 아픈 가슴을 진정치 못하던 터였는데 대비마마의 생신날 「마거리트」양이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두곡씩이나 내가 불렸으니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격분했던 것이다.
내가 그후 일본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의 친왕이 동경을 방문했는데 일부러 나를 제일「호텔」로 불러주셨고, 영친왕 내의분께 소개까지 해주셨다.
해방후 내가 귀국하여 장로교 총회 전도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하루는 의친왕이 나를 부르더니 군정장관 「하지」장군의 고문으로 있는 「언더우드」2세(원한경박사)를 만나게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며칠뒤 의친왕을 모시고 군정청(현 중앙청)군정장관 고문실을 찾아갔다.먼저온 손님이 있어서 응접실에서 기다리려니까 최창학씨와 박흥직씨가 나왔다. 의친왕을 만난 원박사는 『제가 무슨 도와 드릴 일이 있읍니까』고 물었다. 의친왕은 구왕실사점을 대강 설명한 뒤 『가장인 내가 우리가문의 관리인이 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이왕직장관자리는 내가 맡는것이 좋겠다』면서 선처를 부탁했다. 그러나 원박사는 인사문제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면서 현재 윤비마마의 동생이 이왕직장관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완곡한 거절의 뜻이었는데 중간에 선내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인사를 갔더니 의친왕께서는 『내가 이왕직장관이 되면 창덕궁 가까이에 교회를 지어 황군율목사로 초빙하려고 했었는데…』 아마 이것이 영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데 미국가거든「마거리트」양을 찾아보오』라고 하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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