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제59화 함춘원 시절-김소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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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인 교수들>
서양의학의 도입과 보급은 서로 다룐 개성과 형태로 두 군데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일제의 조선총독부의원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 선교사들의「세브란스」의원이다.
의학교육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교육방식이나「캠퍼스」의 분위기·병원시설 등이 서로 대조적이었다.
「세브란스」는 모든 것이 미국식이었다. 그러나 경의전과 조선총독부의원은 독일 풍을 본 받은 일본식이었다.
어떻든 45년 해방이 되어서 우리들 자신이 대학을 인수 할 때까지, 그러니까 한일합방이후 35년간 일인들에 의해서 우리 나라 의학교육은 행해진 것이다.
그들의 공과를 새삼 여기서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오늘날의 함춘원을 있게 한 장본인들이기에 일인 교수들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마도 내게 가장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선생이 있다면 그는「이와이」(암정계사낭)교수일 것이다.
I920년 우리 나라에 와서 8·15해방으로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26년간 경의전과 성대에서 내과 학을 가르친「이와이」교수는 우리 나라 내과의 스승인 셈이다.
그가 양성한 제자는 수천을 헤아리지만 대표적인 내과학자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임명재(제16대 대한의학협회회장) 박종선 민병기(전 내무부장관)엄중섭 신현돈(전 내무부장관)유영규 김용필 함원영 유석균 계인교 김근배 오현관(조선대의대교수)김승현 김련희 전종휘(「가톨릭」의대교수) 이주희 (한일병원 전 신경성전기부속병원장)김경직(전 서울대의대교수) .
나도「이와이」교수 밑에서 l924년8월부터 35년5월까지 11년간 연마했다.
그는 비록 키가 작고 몸집이 작은 편이었으나 안광에 위엄이 서렸고 엄격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한없이 인자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자를 어느 누구보다도 보살피고 아꼈다. 특히 내가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당시 함춘원을 비롯해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와 풍파를 일으켰던 나의 결혼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해 주고 감싸주었던 점이다.
내가「혁명적 결혼」이라고 부르는 나의 결혼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떻든「이와이」교수는 스스로 의료계 인사 1백여명을 명월 관에 초대해서 피로연을 열고 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는데 사면초가였던 나로선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내가 그를 최후로 만난 것은l963년 일본 의학 회 총회 참석 차 일본에 들렀을 때다. 경의대 병원에 입원해서 위암과 투병 중이었다. 여전히 근엄한 모습이었는데 결국 그해 7월 타계했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동기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 일인교수는「도꾸미쓰」(덕광미폭)병리학 교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뇌가 명석하고 기억력이 비장한 그는 명 강의로 우리들 사이에 평판이 높았다. 강의할 때에 아무런 자료나「노트」없이 그냥 술술 청산유수로 구연하는 것이 명 강의였던 것이다.
칠판에 글씨를 쓸때도 오른손과 왼손을 다 구사하는 특재가 있었다.
강의뿐 아니라 연구업적도 훌륭해서 전문학교 출신인데도 그토록 힘든 경성상대 병리학 주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조선인 학생」을 격려하고 자극했다.
4학년 때 일인 학생을 빼고 우리들만 졸업수학여행을 갔었는데「도꾸미스」교수가 인솔했었다. 일본「센다이」지방으로 여행하면서 우리들은 즐거움보다는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마음이 편 할 리 없었다. 우리들의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지만 일제는 우리「조선인 학생」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차별을 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우리들의 표정을 본「도꾸미스」교수는 그때 여관방에서 우리들을 앉혀놓고『너희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출세 할 수 있다』면서 밤새도록 열변을 토했다. 그의 영향을 받았음이라. 24년에 졸업한 우리 동기는 다른 어느 때 즐업생 보다 의학박사가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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