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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마지막 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독일 시인 「헤르만·헤세」는 『회고한다는 것은 언제나 가을과도 같다』고 말한 일이 있다. 「닉슨」회고록을 보면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진 후원이라도 산책하는 양 적막과 우울함으로 가득차 있다.
한때 「닉슨」은 제왕으로 불린 일도 있었다. 60% 이상의 지지를 받아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그의 말마따나 「한 시대가 끝나고 또 다른 새 시대」가 시작되는 북경 외교의 문을 연 그였다.
한 개인으로는 패배와 패배의 수렁을 건너 재기의 정상에서 세계의 지평선을 바라보던 입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은거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무력하고 고독한 노인이 되었다.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사람들은 대개 회고록을 남겨 놓고 있다. 「소셜·리얼리스트」였던 「흐루시초프」까지도 미국의 기자와 대좌하고 자신의 「센티맨틀·멤와르」를 구술했었다.
그것은 자신의 족적을 더욱 뚜렷이, 그리고 크게 남기고 싶은 인지상정의 발로일 것이다. 모든 회고록이 미화와 과장의 흔적을 숨길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닉슨」의 심경은 쉽게 짚어 볼 길은 없지만 다른 어느 미국 대통령의 경우와는 대조적인 것 같다. 그는 우선 「역사의 위인」이자 「역사의 죄인」이 되어버린 「아이러니」의 인물이다.
「닉슨」 자신도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의 악몽을 결코 덮어 버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때때로 『나중에 알고 보니……』라는 어색한 술회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솔직한 인상을 준다.
그를 바라보는 미국 시민의 눈초리는 아직도 차가운 것 같다. 「닉슨 회고록」의 불매운동까지 벌이겠다고 벼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의식한 때문인지 그는 자신이 열어 놓은 새 시대나 업적을 기대 이상으로 과장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대세를 알자 감연히 자연인으로 돌아간 그의 인간다운 모습을 보는 일이다. 권력의 종말을 맞을 무렵 그는 눈물도 흘리고 기도도 올리고 또 초조해 하기도 했다.
대저 아무리 강하고,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그 내면엔 인간적인 면모를 감추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에 새삼 눈길을 멈추게 된다.
「닉슨」에겐 아직도 역사의 심판이 남아 있지만 한 인간의 생애엔 「영원한 영광」도 「영원한 권력」도 없다는 것을 「닉슨」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지가 독점 연재한 그의 회고록은 마지막 부분을 수수한 가장으로 돌아간 자신의 모습에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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