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과 마음속의 철조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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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도시 주택가마다 겹겹이 둘러쳐진 녹슨 가시 철망의 살벌한 풍경은 우리 사회를 농무처럼 짙게 뒤덮고 있는 불신풍조의 상징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상황 아래서 사람들은 자연히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본능적으로 자위책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장에서 물건하나 사는데도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품질을 점검하고 값을 비교해 보지 않고서는 속지 않았다는 자신을 갖지 못한다.
남의 진심도 호의도 액면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며, 일단 감춰진 저의가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하는 것이 오늘의 세태다.
사회 환경이 이처럼 불신 풍조로 가득 차고 보면 모두가 자기 방위에 급급한 나머지 남을 위해 선을 행할 마음의 여유가 생겨날 리가 없다. 나 아닌 남, 내 가족 아닌 모든 이웃을 일단 도둑시하여 담장뿐 아니라 「마음속의 철조망」까지 쌓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신의 풍토 속에서는 사회 공동체로서 「우리」는 빛을 잃기 마련이다. 오직 개인과 개인의 동물적 욕구 추구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만이 생존의 방식이 된다.
이리하여 자신의 이익이 확보되면 그 주위에는 담을 쌓고 겹겹이 철조망이 쳐진다. 이런 사회란 결국 남들과 어울려서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인 인류 공동 사회의 기본 준거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기본적으로 이웃을 경계시하고 적대시해야만 살 수 있는 살벌한 사회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날로 성행하고 있는 철조망 현상은 주택가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이 같은 적대적인 경계심이 다층화해 가고 있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어찌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다시 말해 여와 야, 고용인과 피고용인, 스승과 제자,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등 상호 의존·호혜의 원칙에 충실해야 할 공동 사회의 「파트너」들이 하나같이 편협한 아집과 이기 때문에 연대 의식을 방기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조망 사회는 우리가 부닥친 정신적 위기이며 화합의 기반을 근저로부터 위태롭게 하는 위기적 상황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종래의 폐쇄 사회에서 개방 사회로, 나아가서 국제 공동 사회로 발돋움하는 과정에 있다. 이런 마당에 국민 상호간의 연대 의식의 결여 현상마저 드러낸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서로가 믿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느냐하는 인간 생활의 궁극적 목적과 가치를 실현하는 길과도 통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물질적 풍요를 구가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서로 신뢰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를 등한시하는 이상 미구에는 반목에 의한 파국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근자 전남 일부 지방과 대구 등지에서 일기 시작한 철조망 없애기 운동이 의외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볼 때 전국적인 「담장 혁명」의 가능성은 이미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불신풍조의 제거를 위해서는 이처럼 국민 개개인이 마음속에서 조용한 자기 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개인의 가슴마다 밝은 사회, 깨끗한 사회, 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진지한 자세와 각성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혼자만 잘 살려고 발버둥치는 이기적 행동은 그 하나 하나가 스스로 발 붙일 곳을 깎아먹는 행동이 될 뿐만 아니라 공동 사회 전체의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것임을 자각할 때 불신의 철조망도 걷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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