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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장쉐량, 첫 만남서 쑹메이링에 쏙 빠져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쑹메이링을 만나기 1년 전, 프랑스에서 구매한 수상비행기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베이다이허(北戴河)에 도착한 장쉐량. 1924년 여름. [사진 김명호]

인간은 별것도 아닌 인연을 필연으로 만들 줄 아는 동물이다. 근 한 세기에 걸친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의 인연도 시작은 우연이었다.

1925년 4월 중순, 칭다오(靑島)의 일본인 소유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언했다. 1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연일 거리를 메웠다. 순식간에 상하이로 번졌다. 노동운동 지도자가 피살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5월 30일, 상하이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공동조계의 영국인 순포(경찰)가 시위자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국학생총회가 전국에 지원을 호소했다. 베이징, 광저우, 우한 등 대도시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공장과 교실을 뛰쳐나왔다.

이런 와중에서도 군벌들 간의 전쟁은 그치지 않았다. 장쑤(江蘇)와 안후이(安徽)까지 세력을 넓힌 동북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톈진에 주둔하던 장남 장쉐량을 불렀다. “지금 중국은 외국 자본가들의 낙원이다. 코 큰 것들이나 원숭이 같은 것들에게 농락당하지 않으려면 민심부터 얻어야 한다. 민심이 떠나면, 평소 가까웠던 외국 지도자들도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 때를 놓치지 마라.”

5월 31일 장쉐량은 상하이의 전국학생총회 앞으로 위로 전문을 보냈다.

“노동자들을 지원하던 학생들이 영국 경찰의 발포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늘의 뜻(天道)이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한 건지, 슬픔을 가눌 방법이 없다. 국력이 약한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져도 좋단 말인가! 내가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간 모아둔 봉급 2000원을 보낸다.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한기(寒氣)를 면하는 데 써주기 바란다.”

이런 소문일수록 빨리 퍼지기 마련이다. 쑹메이링도 상하이 청년회의소에 갔다가 장쉐량이 보냈다는 전문을 읽었다. 그날 밤 언니 칭링(慶齡·경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형부 쑨원과 장쭤린은 본질이 다른 사람이다. 장쭤린은 대군벌이지만 아들 장쉐량은 애국자다.” 쑹메이링 28세, 장쉐량 25세 때였다.

6월 14일 오전, 장쉐량이 지휘하는 동북군 3000명을 태운 열차가 상하이에 도착했다. 역 광장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단상에 나타난 장쉐량은 당당했다. “나는 군인이다. 외교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쌍방의 충돌을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 도시에 왔다. 그것이 군인의 천직이다. 내가 인솔하고 온 군대는 군인이 지방의 안전을 위해 공헌한 선례를 남길 것이다. 군기를 위반한 자가 발견되면 신고하기 바란다. 군법에 의해 엄히 처단하겠다.” 박수갈채가 터졌다.

장쉐량은 단 밑 제일 앞자리에 앉아 박수를 쳐대는 젊은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빨간 치빠오를 걸친, 눈이 똥그란 여인이었다. 천하의 바람둥이 장쉐량은 한눈에 알아봤다. “누구 부인인지 몰라도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처음 보는 여인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날 밤, 상하이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서 장쉐량을 환영하는 칵테일 파티가 열렸다. 육군 중장 복장의 장쉐량이 등장하자 영국 기자가 물었다. “영국군 2만 명이 상하이 인근에 와 있다. 장군이 인솔한 병력은 3000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거의가 동북강무당 학생이라고 들었다. 영국군과 무력충돌이 발생했을 경우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궁금하다.”

장쉐량은 여유만만했다. 영어도 유창했다. “조정과 질서유지가 목적이다 보니 생도들을 데리고 왔다. 베이징에서 상하이에 이르는 철도연변에 동북군 20만 명이 포진해 있다. 충돌이 발생하면 상하이로 이동시키겠다. 영국 측은 자제해 주기 바란다.” 박수가 요란했다.

장쉐량이 답변을 마치자 참석자들이 다가왔다. 청년 장군 앞에 허리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악수를 나누던 장쉐량은 먼발치에 오전에 본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손에 깍지를 낀 채 장쉐량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65년이 지나서도 장쉐량은 쑹메이링과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했다. “기품이 넘쳤다. 웃는 모습이 어찌나 품위가 있던지, 그간 보아온 만주 꾸냥(姑娘·아가씨)이나 북방의 여인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전 외교부장 후한민(胡漢民·호한민)에게 물었더니 쑨원 선생의 처제라며 싱긋이 웃었다. 그제야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톈진에 있을 때 쑨원과 함께 온 쑹칭링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쑹메이링은 언니와 옆모습이 비슷했다. 후한민과 함께 글라스에 포도주를 가득 채워 들고 쑹메이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창밖에 빗소리가 요란했다.”

이때 황푸군관학교 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광둥에서 지방군벌과 한 차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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