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시정 진언의 계기 국사상의 천재지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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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사상에 기록된 지진·가뭄 등 천재지변은 줄잡아 4만여 건. 이 천재지변이 역사적으로 정치사상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며 그 기록은 언론활동에 정비례한다는 해석을 발표해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외대 박성래 교수(역사학)는 16일 한국 과학사학회의 월례 발표에서 여러 문헌에 기록된 천재지변을「컴퓨터」로 분석, 『한국사상에 나타난 천재지변의 기록』이란 논문에서 그 같은 사실을 밝혔다. 다음은 발표된 요지.
한국사의 여러 문헌에는 수많은 천재지변의 기록이 있다. 일식·월식·지리·가뭄·홍수에 관한 기록을 비롯해 해가 두세 개 함께 떴다는 기록, 세 쌍동이·네 쌍동이의 기록,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는 기록 등 진기한 기록들이 들어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삼국사기에 약 1천 건, 고려사에 약 6천5백 건, 조선왕조실록(1392∼1530년까지만)에 약 8천 건이 들어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전 기록을 조사완료 하면 대체로 4만여 건 정도가 될 것이다.
풍부한 천재지변의 기록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 유교문화권 국가들의 전통적 역사기록에 있어 하나의 특징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미신적 또는 종교적 이유 이외에는 이러한 기록의 존재이유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고대사의 경우, 미신적·설화적 측면에서는 그 존재이유가 인정돼 있다. 또 고려조·조선조 시대의 역사에 있어서도 천재지변의 미신적 해석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다.
가뭄이나 홍수는 생활에 직접 연관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의 존재이유가 명백하다. 그러나 태백주견이나 일운, 고목회생 같은 것이 어떤 이유로 열심히 기록된 것인가는 의문이마 과학사상사에서 앞으로 연구될 과제다.
천재지변기록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미신적 해석이다.
그 한 예로 남이 장군의 옥사사건(1468년)은 혜성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미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둘째로는 정치적 해석을 들 수 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혜성을 혁명의 전조로 믿어왔다. 혜성이 나타나면 왕은 특별경계를 하곤 했다. 중국 한대의 천재지변을 연구한「H·빌렌슈타인」은 천재지변 기록의 숫자는 각 황제의 인기도에 반비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 특히 조선왕조의 경우 이러한 정치적 요인은 거의 없다. 1530년까지의 한국사에 기록된 천재지변을「컴퓨터」로 분석하고 그 반응을 연구해본 결과 자료가 풍부한 왕조실록(1392∼1519년)에서는 계속 미신적 요인이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천재지변의 빈도가 왕의 인기도와 반비례하지 않았으며 모범적인 왕들의 경우에 오히려 많은 천재지변 기록이 있는 경향을 나타냈다. 또 천재지변은 왕의 구언과 신하들의 진언의 계기로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함으로써 그 빈도는 언론활동의 계수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천재지변의 기록은 본래 그 목표가 과학적 관측기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기록들을 오늘날 과학자들이 이용하는데 있어서는 상당한 역사적 배려가 필요하다.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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