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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외교」는 북괴 직원 제보로 드러났다|본사 박중희·주섭일 특파원 「들끓는 북구」 입체 취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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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헬싱키 (핀란드)=주섭일 특파원】「헬싱키」 경시청은 지난여름 「헬싱키」의 북괴 대사관의 수리 작업 때 밀수 단서를 잡았다. 북괴는 수리비용을 현금이 아닌 소련산 술「보드카」로 대신 받으라고 요구했다. 「핀란드」의 수리 업자는 「보드카」를 받지 않고 외무성에 이 사실을 신고했다. 이러한 예는 북괴가 면세술이나 담배를 팔아 공관 운영비로 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헬싱키」 경시청은 북괴 대사관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 면세술과 담배를 암매하는 증거를 잡았다는 것이다.
추방령 이후 「헬싱키」 시내 북괴 대사관에는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고 있다.

<구경꾼들 몰려들어>
구경꾼들은 대사관 건물의 게시판에 붙어 있는 김일성의 사진과 얼마전 이곳에 다녀간 만수대 합창단 사진을 신기한 듯이 쳐다본다.
건물 안은 비교적 조용했으나 직원인 듯한 여자가 한복차림으로 물 항아리를 들고 정원을 지나갔으며 검정색 양복에 금「배지」를 단 2명의 사나이가 얼씬거렸을 뿐.
22일 하오 2시쯤에는 갑자기 대사관의 「스웨덴」제 「볼보」 승용차가 나타나 금「배지」를 단 2명의 외교관이 내렸는데 이들은 사진을 못 찍게 했다. 한명은 약간 어색한 「핀란드」말로 『사진을 찍으려면 미리 협정(무슨 의미인지?)해서 찍으십쇼. 자, 빨리 돌아가십시오』라고 손짓했으나 며칠 전 「핀란드」 TV 방송 직원을 폭행한 난폭성은 숨기고 미소를 가장하고 있었다. 그는 또 『우리들은 당신들에게 할말이 없읍니다』라고 밑도 끝도 없이 말하기도 했다.

<곧 돌아오십쇼, 굽실>
북괴 외교 당국자는 22일 북경으로 철수한 「핀란드」의 평양 주재 「아르토·바이니온마키」 상무관 (38)에게 재 입국 「비자」를 발급할 때 『가능한한 빨리 돌아오기 바란다』고 공손히 말했다고 「핀란드」의 「헬싱키·시노마트」지(사회당계 최대 신문)와 「우소·수오미」지(신 「핀란드」 민족계)가 동시에 전했다.
이 보드에 따르면 「스웨덴」의 평양 주재 「에릭·코르넬」 대리대사도 가족과 함께 22일 평양에서 철수할 예정으로 비행기표까지 샀으나 북괴 측이 마약 등 밀수에 관련된 「스웨덴」 주재 북괴 대사 길재경 등 4명의 외교관을 소환함으로써 무마됐다는 것이다.
한편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관 직원 「오아케·데테르손」도 22일 부인과 함께 평양을 떠났으나 그는 북경에서 열리는 운송 관계 전시회 참석 겸 본국으로 보내는 「파우치」 때문에 북괴를 떠난 것으로 해명되었다.
「핀란드」 외무성은 22일까지 아무런 성명도 내지 않고 있으나 북괴의 「헬싱키」 주재 대사관 대변인 이택근은 『죄가 없다』는 억지를 연발하면서 『경찰이 압수했다는 물건은 지난 10월초 대사관 창고에서 도둑맞은 것』이라고 거듭 우겼다.

<경시청은 자신 만만>
이에 대해 「헬싱키」 경시청 「카우코·카타자우리」 형사 부장은 『우리는 조그마한 도난 사건이라도 철저히 수사한다. 경찰뿐만 아니라 외무성도 북괴 대사관으로부터 도난 신고를 받은바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되자 북괴 대사관은 『신고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도난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버티고 있다.

<철수 거부로 또 망신>
「핀란드」 경찰과 정보 기관은 「기피 인물」로 낙인찍힌 장대희 북괴 대리대사 등의 동정을 주시했는데 이들이 아직 전혀 짐을 싸지 않고 있는 동정도 탐지했다.
「아르토」 평양 주재 상무관 철수는 이에 대한 예비 조치로 경고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관측통들이 해석했다.
현재 「핀란드」만큼 취재가 안되는 나라도 드문데 이는 경찰과 외무성이 모두 조용히 마약 외교관을 내보내기 위한 작전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괴 외교관 추방 문제는 외상만이 말할 수 있을 뿐 아무도 말못하게 함구령이 내려져 있다.
경찰이 북괴 외교관의 범죄를 발표하지 않은 것은 북괴의 입장을 보아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북괴가 경찰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생트집 잡자 주재국의 추방령을 거부하고 번의 하기를 요구한 것은 적반하장이라는 여론이다.

<궁금한 운전사 행방>
북괴가 올 들어 「노르웨이」에서 수입한 것은 3천「달러」어치의 바닷가재(롭스터) 뿐이다.
「노르웨이」산 바닷가재는 크고 맛 좋기로 이름나 있는데 서민들이야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것으로 김일성이나 고관들의 식탁에 올려졌으리라는 추측이다.
「헬싱키」 경시청은 수천 상자의 「보드카」와 수많은 담배, 그리고 「스위스」 북괴 대사관의 경우처럼 시계까지 장사한 증거를 잡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마약 관계만은 아직 확증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2일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알려진 바로는 「핀란드」와 「스웨덴」 대사관의 북괴 직원 2명이 「덴마크」 경찰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지난여름 「헬싱키」 교외에서 「핀란드」 주재 대사관 직원 1명이 실종됨으로써 드러났다는 보도다.
이들은 「헬싱키」의 한 상점 앞에 차를 세워 뒀으나 끝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운전사는 직업상 북괴 대사관의 밀수 진상을 잘 알고 있어 이들이 이번에 사건이 터진 어느 한나라 경찰에 경정적인 제보를 하고 도피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오슬로(노르웨이)=박중희 특파원】그동안 잠자는 듯했던 외진 북구 도시 「오슬로」에서도 밀수 사건은 어디서나 커다란 화제다.
그리고 덕분에 『코리언스케」(한국인)』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우편국까지 기자를 태워다준 젊은 운전사까지도 지금 막 7시 반 「뉴스」에서 「평양 손님」들이 내일 저녁까지는 보따리를 싸게 될 것이라고 하더라면서 뭐 오랜만에 신나는 화젯거리 하나 생겼다는 듯 묻지 않은 얘기까지 줄줄 늘어놓는다.
『글세, 「보드카」한병에 80「크로네」(약 8천원)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4천 병이면 그게 얼맙니까. 나도 진작 외교관이나 할걸 그랬단 말입니다』 한다.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우선은 이런 일이 지금까지도 대체 없었던 일이고 있음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은 물론이다.

<주체 사상이 밀수냐>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묘한 광고가 세계 각 신문에 실려 참 별란 사람들도 다 있구나 하던 차에 이런 일이 터지고 보니 화제가 안되기가 어렵다.
「이코너미스트」 잡지에서도 『김일성씨의 주체 사상이나 자립 정신이 무언가 했더니 바로 「알콜」(술)·「니코틴」(담배)·마약이라도 팔아서 각자 제 손으로 벌어먹으라는 거였구나』하는 식의 글을 싣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다가는 평양의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딴 한국 사람들에게까지 엉뚱한 화를 미칠 판이다. 그러니까 남쪽 사람들도 자칫 「도매금」으로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식층 사이에서야 남과 북이 명백히 구분되어 인식되고 또 이번 「스캔들」이 북쪽의 정치적 이상 체제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긴 하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그동안 서구 일부, 특히 「스칸디나비아」안의 일부 북쪽에 좀 소박한 호의를 가져온 경향과 지식인들에게 『잔등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됐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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