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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방공에 앞선 5부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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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25동란이 일어 난지 어언 26년-.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숱한 일화와 교훈을 남기지만 6·25는 최근의 월남전과 함께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의 정신이 국가흥망의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실감시켰다.
6·25를 이틀 앞둔 23일 동작동국립묘지로 큰아들 이우씨의 묘소를 찾은 조진영씨(51·서울영등포구 신도림동281의95)부부는 『해마다 이때만 되면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되살아나곤 한다』며 묘소에 국화꽃을 놓았다.
조씨의 가족은 부자5명이 멸공대열에 반공의 역군.
조씨는 6·25때 참전했다 부상했고 큰아들은 월남전에서 전사했으며 둘째와 세 째는 육군과 해병대를 제대한 예비군, 막내는 현재 육군하사관 후보생으로 군에 복무하고 있다.
고향이 경기도 연천인 조씨는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다 해방으로 고향이38선 이북에 속하게 되자 노부모와 생이별, 50년5월 경찰관이 됐다.
50년6월28일 상오4시쯤 협로경찰서 소속이던 그는 북괴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동료경관 70여명과 한강을 건너려던 순간, 타고있던 차가 적의 포화에 명중하는 바람에 왼쪽 손가락 2개가 끊어지고 왼쪽다리와 척추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모래사장으로 떨어져 목숨을 건진 조씨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이틀 뒤인 30일.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그를 당시 함께 근무하던 현간섭 총경(52·강원도번수사과장)이 구출, 대전육군병원까지 후송시켰다.
조씨는 장이 군경이 된 후에도 계속 경찰관으로 복무하다가 58년 초 경사로 진급한 뒤 경찰 직을 떠났다.
조씨의 큰아들 이우씨는 20세 때인 65년11월 조씨가 사업에 실패하여 대학 진학이 어렵게되자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다.
월남전에 참전한 이우씨는 귀국일자 3개월을 앞둔 67년8월15일 격전 중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씨의 부인 황채옥씨(51)는『남편이 불구가 되더니 아들까지 잃었다』며 한동안 실신,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씨 가족은 뒤이어 둘째 진환씨(28·김포공항근무)세 째 진호씨(25)를 차례로 입대시켜야 했다.
조씨 부부는 이때를 가장 괴롭던 때로 기억한다.
사업이 망해 궁핍한 생활로 공사장에서 인부들의 식사 일까지 도와야했으며 한 아들을 잃고 두 아들이 슬하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느꼈던 외로움 때문이었다는 것.
조씨는 이때부터 전몰군경유가족과 상이용사들의 어려운 생활을 실감, 내 자신의 일보다 이들을 위한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다치신 그 날이 다가옵니다. 그 날의 원수를 제가 갚겠읍니마』-지난5월말 군에 입대한 막내아들 진홍씨(22)가 하사관훈련을 받으면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다.
조씨는 『내가 흘린 피가 부족해서인지 아들에게까지 숙제를 남긴 것이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면서『모든 국민이 일치단결,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이 없어야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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