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잘 먹고 잘 쉬는 것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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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호 22면

필자의 오전 외래진료가 계속 지연된 날이었다. 낮 12시가 넘었는데도 많은 환자가 나를 기다렸다. 오전 진료는 점심시간을 훨씬 넘겨서 끝났다. 마침내 진료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밥을 먹고 난 뒤 후회가 밀려왔다. 그 친구도 오랫동안 기다리다 나를 만났을 것이다. 평소 잘 알던 사이인데 왜 그리 짜증을 냈을까 싶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싶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저 난 지쳤을 뿐이었는데….

상심한 마음에 책을 뒤적이다 한 연구논문을 발견했다.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 단지거 교수는 판사들의 가석방 패턴을 분석했다. 판사들은 10개월 동안 1112건의 가석방 여부를 심사했다. 평균 6분에 한 건씩 결정을 내렸고, 보통 하루 수십 건을 처리했다. 빡빡한 일정에서 한 패턴이 발견됐다. 오전 첫 1시간과 중간의 휴식시간 직후에 가석방률은 65%로 최고치를 찍고 시간이 지나면서 가석방률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휴식 직전엔 가석방률이 제로에 가까워졌다. 평균 경력 22년인 판사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단지거 교수는 “우리의 뇌는 짧은 시간에 많은 부하가 걸리게 되면서 자아가 고갈되면 최대한 단순하고 쉬운 결정을 내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일수록 피곤해지면 가장 안전하고 보편적인 결정을 직관적으로 내린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 가능성을 보거나 관대한 처사로 인해 발생할 위험을 부담하려 들지 않는다.

인간의 뇌는 1450g에 불과하지만 하루 필요한 열량의 20%를 소모하는 고(高)비용 장기다. 혈당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지친다. 이때의 신호는 ‘짜증’이고 결과는 ‘보수적 판단’이다. 혈당 저하의 두 번째 문제는 충동 억제가 안 되고 유혹에 잘 넘어간다는 것이다. 욕망을 이겨내는 데도 뇌는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고플 때 마트에 가면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많이 산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은 꼭 필요한 것이야”라는 자기 합리화까지 한다.

이때 뇌는 평소 억제하던 유혹에 쉽게 넘어가며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속삭이면서 쉽게 판단을 해버린다. 특히 고열량 음식의 유혹에 약해진다. 뇌가 부족한 칼로리를 빨리 보충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요일 밤이 되면 1주일 동안의 피로를 풀기 위해 삼겹살이나 곱창이 당기나 보다.

결국 나라는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지치고 배고픈 상태였던 것이 제약회사 영업사원에게 낸 짜증의 원인이었다. 어느 정도 설명이 되고, ‘면죄부’를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지만 찝찝함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여하튼 평소와 달리 표정관리를 못하고 짜증이 나거나 성급히 결정을 내리거나 여유를 갖지 못할 때는 먼저 ‘지금 지쳤나?’ ‘배가 고픈가’라는 아주 단순한 부분부터 검토해야 한다.

자동차가 서버리는 제일 단순한 이유는 큰 고장이 아니라 연료가 떨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관대해지고 여유가 있으려면 일단 잘 먹고, 푹 쉬어야 하는 과학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할 일이 많아 잠잘 시간은 모자라고, 날씬해지기 위해 허기를 무릅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라 세상이 각박해지고 사람들은 날이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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