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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전경련이 전국의 1천7백63개 기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금융실태조사를 보면 올해는 몇 년만에 다시 사채업자들이 톡톡히 재미보는 해가 될 조짐이 짙다. 연초부터 은행창구로 몰려드는 자금수요를 봐도 그렇고, 정부가 짜놓은 올해의 종합자금 계획의 규모로 미루어 봐서도 그렇다.
자금의 성수기도 아닌 1월에 이미 1천억원의 국내여신이 풀려나간 것을 보면 자금을 둘러싼 기업과 통화당국간의 공방이 올해에는 매우 치열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전경련조사로는 이미 시중사채금리가 5%까지 오르고 규모도 거액·장기화되고 있는 형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이 싸움의 주도권은 아무래도 돈줄을 쥐고 있는 당국 쪽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자금계획에서 드러내 보인 당국의 긴축방침은 매우 확고한 듯 하다.
통화에서 긴축하겠다는 얘기는 여러 번 들어왔지만 실제 통화증가율을 20%라는 이례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압축시킨 도상계획을 볼 때 기업측은 적지 않은 압박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 수준은 지난 수년간의 통화증가추세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긴축적이며, 불황의 바닥이었던 지난해의 25% 보다도 낮은 증가율이다. 문제는 자금의 수요만 크게 늘지 않는다면 긴축의 부담은 흡수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기가 회복되는 국면이나 투자수요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자금수요를 억제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연초부터 폭주하는 은행대출 수요는 그만큼 투자수요가 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통화당국으로서는 대처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오랫동안의 불황으로 투자 의욕을 잃고 있던 기업들로서는 희미하게나마 경기가 회복될 기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올 들어 늘어나고 있는 수출부문이 이러한 경기회복감을 더해주고 있기 때문에 또한번 투자「러쉬」를 이룰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에 더하여 판매부진, 원가상승이 겹침으로써 전체 기업의 72·4%가 자금난심화를 호소하게된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긴축과 설비투자의 공방은 안정과 수출이라는 일견 조화되기 어려운 두 명제의 최적결합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 자금계획은 이 같은 최적결합을 선별금융의 강화로 일부 해결해보자는 의도인 것 같다. 한정된 자금의 대부분을 수출산업에 집중지원하고 나머지 내수산업이나 일반자금 지원은 지난해 보다 오히려 줄인다는 것이다.
재원의 한계나 자금의 효율성만으로 본다면 수출산업의 우선 지원이 불가피하겠지만, 없는 돈이 그나마 수출쪽으로만 쏠린다면 일반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은 더욱 가중될 것이 분명하다. 내수산업이나 중소기업은 지금까지도 수출산업에 비해 항상 덜 배려되고 있지만, 이런 수출산업 우선주의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고용이나 생산의 기여도에서 볼 때, 이들 산업에도 마땅한 지원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수를 중심한 중소기업은 경기대응력이 약할뿐더러 불황기간중 대규모 수출산업의 침식으로 그 동안 이중의 고통을 받아왔다. 경기가 회복되면 이들 부문도 시설확장이 불가피하겠지만 지금 형편으로 보면 자금조달의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
특별설비금융이나 산업합리화자금 등 그나마의 돈줄조차 막힐 때 결국 이들은 높은 금리를 주고라도 사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 산업에 대한 자금배분을 늘리도록 수출산업지원폭을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출쪽의 시설자금 수요는 지나치게 성급한 가수요가 잠재되어 있으므로 해외경기 동향을 주시하며 적절히 과열투자를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통화당국이 의당 해야할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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