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브란트 말 빌려 아베 비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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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9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업인과의 만찬에서 연설하고 있다. 시 주석은 방독 중 난징대학살을 거론하며 일본을 비난했다. [뒤셀도르프 신화=뉴시스]

중국의 대일(對日) 역사전쟁에 시진핑 국가주석이 직접 뛰어들었다. 시 주석은 방문지인 독일에서 일본의 난징(南京)대학살을 언급하는 등 강도 높은 용어를 구사하며 일본을 비난했다. 일본은 주일 중국대사관 관계자를 불러 항의하는 등 정면 반격에 나섰다.

 유럽을 순방 중인 시 주석은 28일(현지시간) 저녁 독일 쾨르버 재단에서 한 공개 강연에서 “일본 군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중국 군인과 민간인 3500만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간참극이 빚어졌다”며 “이런 참극의 역사는 중국 인민에게 뼈에 새길 정도의 기억을 남겼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특히 “중국 난징시를 침략해 30여만 명의 중국 군·민을 도살하는 전대미문의 참상을 저질렀다”고 강조했다.

 시 주석의 언급은 난징학살사건 당시 일본군이 침범할 수 없는 ‘난징 안전구’를 만들어 중국인 20만여 명을 보호한 독일인 존 라베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시 주석은 또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남긴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영혼에 병이 든다”는 말을 인용하며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성어가 내려온다고 설명했다. 1970년 폴란드의 유대인 위령탑에 무릎을 꿇고 나치 독일의 죄상에 대해 사과했던 브란트 전 총리를 언급함으로써 일본 지도자의 반성과 성의 있는 자세를 촉구한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중국의 국가주석이 국내가 아닌 제3국에서 일본의 침략사를 거론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독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시 주석은 당초 독일 방문 기간 중 홀로코스트 현장 방문을 검토했으나 일정 조정 과정에서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시 주석은 강연에서 강도 높은 발언으로 일본을 압박한 것으로 분석된다. 베이징의 외교소식통은 “아베 신조 총리 재임 중에는 일본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게 중국 지도부 내의 기류”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발끈했다. 일본 외무성은 시 주석 발언 직후 주일 중국대사관 관계자를 불러 항의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와 별도로 난징대학살 희생자 규모에 대한 반박도 나왔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30일 기자들에게 “옛 일본군의 살상과 약탈을 부인하진 않지만 희생자 수 등 의견이 나누어져 있는 상황에서 중국 지도자가 제3국에서 그렇게 발언한 것은 극히 비생산적”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스가 장관은 29일 TV도쿄에 출연해 “일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안중근 기념관은 범죄자 테러리스트 기념관”이라며 안 의사를 또다시 폄훼했다. 그는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별도 회담에서 안중근 기념관을 언급한 데 대해 “두 나라만 (회담의 전체 취지에서) 벗어난 듯한 분위기였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외교부는 이날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방장관이 안중근 의사를 또다시 폄훼하고, 이웃 나라 정상 간의 회담에 대해서까지 왈가왈부한 것은 상식 이하”라고 밝혔다.

베이징·도쿄=예영준·서승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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