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갑자기 찾아 온 비행 공포증 때문에 출장도 못 간다는 45세 무역회사 대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Q 무역 회사를 운영하는 45세 남자입니다. 업무상 일본이나 중국으로 자주 출장을 갑니다. 비행 시간아 짧아 그동안 크게 피곤함없이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최근 일본 가는 길에 난기류를 만나 비행기가 몇 번 심하게 요동쳐 많이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갑자기 비행기 안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한번은 승무원이 카트를 이동시키다 내 옆에 멈췄는데 너무 답답해서 거의 정신을 잃을 뻔 했습니다. 이후 엘리베이터는 물론 영화에서 차 트렁크에 갇힌 사람만 봐도 너무 힘듭니다. 큰 계약 건으로 일본에 가야 하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나네요. 갑(甲)인 일본 회사에다 한국으로 올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황당해 합니다. 평소 남자답던 내게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찾아왔을까요, 치료 방법은 있는 건가요.

A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서 휴식하는 것, 생각만 해도 마음이 느긋하게 풀어집니다. 이런 행복한 상상이 오히려 섬뜩한 공포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비행 공포증(flying phobia)으로 고생하는 이들입니다.

 공포증은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국한해 공포가 발생합니다. 그 공포라는 게 지나치고 비합리적이지만 지속적으로 두려움을 만듭니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하지만 피할 수 없게 되면 두려움을 유발하는 거죠.

 비행 공포증은 공포의 대상이 항공기를 이용한 여행입니다. 비행을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엄습하는데, 진짜로 티켓까지 사면 공포감이 더 커지죠. 공항까지 겨우 갔다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더 용기를 내 비행기를 타고 이륙까지 하지만 결국 심한 불안 반응, 즉 공황발작이 오는 경우도 흔합니다. 공황발작은 호흡이 곤란해지고 심장이 마구 뛰어 죽을 것 같기에 더 이상 비행할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갑니다. 승무원들이 비상 상황으로 판단해 회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행 공포증으로 시작해서 점점 공포의 대상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지하철·테러·영화관 공포 등으로요. 공포를 겪으면 다음부터는 그걸 피하려 하기 때문에 삶이 매우 불편해집니다.

 공포증은 왜 찾아오는 걸까요. 통계상으로 10명에 한 명꼴이니 꽤 흔한 편입니다. 사실 공포감 자체는 비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비행기 공포증을 예로 들어 보죠. 비행기는 사고가 나면 치명적이죠. 그러다 보니 이착륙할 때나 불안정한 기류를 만나 비행기가 출렁거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갑니다. 우리 뇌 안의 위기 관리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는 위험이 다가오면 공포라는 불안 신호를 보냅니다. 보통은 그 신호가 금방 사라집니다. 우리 뇌의 중앙 통제 센터에서 그 신호에 대해 살펴 보고 실제 위험이 크지 않으면 ‘안전하다’고 재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공포증은 재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비행기가 추락할 거라고 뇌가 인지해 버리니 불안하고 초초한 마음에 숨이 막힙니다. 한 번이라도 이런 공포를 경험하면 아예 비행기를 타지 않으려는 회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강한 남자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뇌에 피로가 찾아와 평소보다 불안 신호가 더 크게 발생합니다. 또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속 감정을 억누르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공포증이 찾아오기 쉬운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효과적인 대처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선 공포의 재경험을 막는 겁니다. 공포증이라는 걸 확인하면 ‘내 의지로 고쳐보겠다’는 사람이 10이면 9입니다. 그러나 위기 관리 시스템은 우리 뇌 안의 자동 시스템이라 내 의지로 개입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의지가 약해서 공포증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강한 의지로 세상을 사는 사람일수록 뇌가 지친 나머지 예민도가 올라가 공포증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또 강한 의지로 통제하려고 하면 오히려 뇌의 공포 반응이 더 강해지기만 합니다.

 공포증에는 약물치료가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혼자 노력해보다 잘 안되면 약물치료를 받겠다 하지 말고 초기에 적극적으로 약물치료를 받아 증상의 재경험을 막아야 합니다. 반복적으로 공포를 경험하면 뇌를 더 예민하게 만들어 공포가 더 강화되고, 비행기에서 엘리베이터나 자동차 등으로 회피 행동의 범위까지 넓어져 삶의 질이 점점 더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약물치료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면 회피 행동을 없애기 위해 공포 대상에 대한 노출 치료를 합니다. 비행 공포증이라면 부산에서 제주도, 그리고 일본이나 홍콩 식으로 비행 거리를 늘려 가는 겁니다. 성공 경험이 뇌에 입력돼 과도한 공포 반응을 점점 잠재우는 것입니다. 노출 치료를 다른 말로 체계적 탈감각(systemic desensitization)이라고 합니다.

 제 환자 중 한 사람은 비행기는 당연히 못 타고 엘리베이터조차 타기 힘들어 고생했습니다. 병원에 일찍 도착하고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망설이다 진료 시간에 1시간 늦게 온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동생 결혼식이 열린 로스엔젤레스(LA)까지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LA에 간 건 아니고 부산·제주 등 가까운 국내선부터 노출치료, 즉 체계적 탈감각법을 시행한 겁니다.

 외국에 가고 싶어도 돈·시간 등 상황이 안 돼 못 가는데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싶겠지만 당사자에게는 보통 공포가 아닙니다. 대부분 회피 행동을 보이지 스스로 노출 전략을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 노출전략을 하더라고 공포를 제대로 통제 못하면 오히려 공포증이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약물 치료와 병행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약으로 증상을 조절하면서 노출 전략을 활용하는 것이죠. ‘약 먹으면 이 정도는 괜찮아’에서 ‘약 먹지 않고 그냥 갖고만 있어도 편해’ 로 공포증에서 점점 벗어나게 됩니다.

 공포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래나 위험에 대한 불안 신호가 심해졌다 여겨지면 불안 요소를 없애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내 뇌가 지쳐있지 않나 돌이켜봐야 합니다. 운동으로 지친 근육은 그냥 쉬면 회복되지만 우리 뇌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서 금방 피로가 회복되지 않기에 어렵습니다. 뇌는 적극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때 피로에서 회복되고 다시 에너지를 충전해 활기를 찾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 잘 노는 것도 공포증을 예방하는 방법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아래 e메일 주소로 고민을 보내주세요. 윤대현 교수가 매주 江南通新 지면을 통해 상담해 드립니다. 사연을 지면에 공개하실 분만 보내주십시오. 독자분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익명 처리합니다. yoon.snuh@gmai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