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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뚤어진 협력자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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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71년 한·일 각료회담 때 한국 측 수석 대표의 개회 인사 중에 『일본과 같은 자유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을 이웃으로 갖게된 것을 매우 흐뭇하게 생각합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아쉬운 것이 너무나 많은 개발 도상국으로서 이웃 경제 대국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이 인사말속에 담겨있다. 이러한 기대와 요구는 한국뿐 아니라 동남아 개발 도상국에 공통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73년 「오일·쇼크」로 한국은 미증유의 곤란을 겪었다.
74년 중의 무역적자 24억「달러」를 메우기 위해 빚이란 빚은 다 끌어썼다. 그래도 연말껜 외환부도의 직전까지 갔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한국은 2억「달러」의 차관단 구성을 시도했다. 한국에 지점을 진출시켜 영업을 하고있는 외국 은행들이 주 교섭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차관단엔 일본 은행들은 하나같이 참여하지 않았다. 현재 한국엔 9개의 외국은행들이 진출하고 있는데 이중 4개가 일본계다. 최근과 같이 외환부족이 심각할 땐 한국 진출은행들에 통사정을 많이 한다. 그러면 구미계는 상당한 성의 표시를 하나 일본계는 매우 빡빡하다.
「오일·소크」후 한국은 외국은행으로부터 약20억「달러」의 「무레디토·라인」을 얻어 썼다.
이중 일본 은행으로부터 신용 공여는 불과 전체의 4백분의 1인 5백만「달러」에 불과하다. 미국에 본사를 둔 일본계 현지법인분까지 모두 합쳐도 3천2백만「달러」정도다. 또 74년 중 정부는 외화 재원이 모자라 주한 외국은행 지점에 6천만「달러」의 외자 대부를 국내기업에 해 주도록 요청했다. 9개 외국은행에서 모두 5천2백만「달러」의 외화 대부가 나갔지만 4개 일본은행의 실적은2백60만「달러」.
「오일·쇼크」이후 혹독한 경제위기에 부딪치고 나서야 경제 대국에의 부푼 기대가 얼마나 철없는 짓이었으며 「내셔널·인터레스트」의 냉혹함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이 새삼 인식된 것이다.
최근 일본의 냉혹은 「오일·쇼크」의 타격 때문이라고 흔히 변명된다. 그러나 외환이 넘쳐흘러 주체를 못하던 70년대에도 주변국들의 목마른 자금 요구에 별로 선선하지 못했다. 「아시아」유일의 선진 공업국으로서 역내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기대에,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철저한 상업주의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제국과의 거래에 있어 호혜 평등을 원칙으로 내세운다. 심지어 한국의 보험회사가 재일 교포를 상대로 하기 위해 일본 진출을 시도하자 호혜평등의 원칙에 의해 일본 보험회사의 한국 지점인가를 주장했다.
한국 보험회사를 다 합쳐도 일본 보험회사 하나만도 못한 규모의 차이는 제쳐두고 호혜평등만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호혜평등은 무역·조세·해운·어업 교섭 등에서 철저히 주장되고 있다. 상거래 등에서 한국 측의 경험부족 때문에 일본측에 당한 사례는 상당히 많다. 차관이나 합작의 경우는 특히 심하다.
기계의 비싼 구입, 계약서의 교묘한 함정, 손해만 보게 되어있는 합작계약 등은 구미보다 일본이 훨씬 심하다 한다. 구미계 기업은 일단 계약을 하면 약속을 지키지만 일본계는·여건 변화에 따라 계약수정요구가 가장 빈번하다. 때문에 동남아 제국에선 구미계 기업은 현지 기업을 호혜의 「파트너」로 생각하나 일본계는 장사의 이용물로 생각한다는 통념이 일반화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계는 결코 간부직에 한국인을 앉히지 않는다. 공해산업의 수출, 한국종업원의 저임·혹사 등 현지 「트러블」이 많은 것도 일본계다. 74년 비축 금융으로 가장 국체시세가 비쌀 때 물자를 수입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일본상사들이 가운데에 섰다. 물론 비싸게 산 책임은 한국 측에 있지만 뒷맛은 역시 개운치 않다.
이러한 철저한 상업주의가 「오일·쇼크」이후의 세계적 국제수지 적자 수정에서 일본을 가장 먼저 끌어냈는지도 모른다. 일본은 이미 74년 후반기부터 무역수지로 「오일·쇼크」를 흡수했다. 특히 동남아 제국에서 석유적자를 메울 흑자를 끌어낸 것이다. 전형적인 인근궁핍화다. 한국의 무역적자 확대가 일본의 무역흑자 전환에 큰 기여를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과의 거래에서 한국이 당하는 절반의 책임은 역시 한국에 있지만 이것이 그토록 섭섭한 것은 경제대국을 이웃에 둔 기대 때문이다.
어떻든 한국과 일본은 여러가지면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공동의 안정과 번영이 불가결하나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 경제대국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당연히 기대되는 역할을 할때가 충분히 된 것이다. <최우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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