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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창고서 은밀한 부부 「데이트」|보름째 맞는 부산수용소 월 난민의 24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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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구 부산여고의 월남 피난민 임시수용소는『한국 안의 월남』인 이방지대-. 수용소생활이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난민들은 그들의 월남풍습 그대로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외부사회와 차단돼 있기 때문에 아직은 한국사정을 잘 모르는 면. 수용소 안에서 통용어는 말도 월남어 일색. 월남난민들을 처음 맞은 구호본부직원들은 한때 낮선 풍습에 어리둥절했다. 그만큼「에피소드」도 많다.
○…낯선 피난지의 수용소에서 보름을 보낸 월남인들은 그들의 천성인지, 또는 오랜 전화에 시달린 탓인지는 몰라도 일반적으로 무표정하다.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다. 그러나 규칙적인 생활에는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는 구호본부 측의 말.
구호본부는 LST난민들이 수용소에 도착하차 매일 상오 7시30분∼8시까지를 맨손 체조시간으로 일과에 넣었으나 난민들의 대부분이 맨손체조를 해본 일이 없다고 거부, 첫날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월남인난민들이 가장 즐겨먹는 「메뉴」는 튀김과 잡채. 구호본부는 당초 월남인들의 식성을 고려, 「메뉴」를 짰으나 많은 난민들이 혼합곡 쌀밥을 못 먹겠다고 말해 죽을 끓여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처음 죽을 끓여주자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난민들이 생겨 구호본부 직원들을 당황하게 했다. 뒤에 알려진 것이지만 이들은 미국 측에서 구호자금을 대주는 것으로 잘못 알고 음식투정을 부렸으나 그들의 구호를 순전히 우리 자원으로 한다는 것을 이해한 다음부터는 투정이 이 없어졌다.

<환전된 금 9백g>
○…몇몇 부유층 난민들은 수용소 음식이 식성에 맞지 않을 때는 구내 매점을 이용하기 일쑤. 때로는 구내 매점에서 팔지도 않는「비프·스테익」과 통닭구이를 찾아 직원들이 밖에서 사다주는 수고까지 해야만 했다.
이들이 구내 매점에서 쓰는 원화는 모두가 환전소에서 금이나 「달러」로 바꾼 것.
수용소 환전소에서 27일까지 난민들로부터 사들인 금괴는 모두 8백94.95g으로 값은 2백83만8천8백원.
거의가 무일푼인 우리 교민과는 달리 이들이 신고한 금괴만 1백50냥(시가 2천만원)이상이 4명이나 되고 한 아가씨는 매점 점원에게 10만「피아스타」를 기념으로 주기도.

<서로 돕는 법 없고>
그러나 난민들의 대부분은 돈을 아껴 쓰는 편이어서 구내매점에서 관리는 담배도 비싼「은하수」나 「한산도」보다 40원짜리「새마을」이 90%를 차지하고 있다는 매점 측의 설명.
○…난민들은 자기네들끼리도 인정을 베푸는 일이 거의 없다. 지난 14일 모 월남고위관리의 가족들에게 「비스킷」·통조림 등이 전달됐다.
면회 온 친지들이 밖에서 사다 준 것으로 적지 않은 양이었으나 같은 호실에 수용된 동쪽끼리도 나누어 먹지 않더라는 호실 안내원들의 귀띔.
○…LST난민들이 처음 수용소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경찰관들이 비를 맞으며 경비 근무하는 것을 본 월남인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들이 통역관에게 던진 첫마디가 『한국 경찰은 비가 오는데도 근무하느냐』고 묻더라는 것. 월남에서는 비가 오면 전쟁도 중단되는데 경비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은 경찰관은 처음엔 통역관이 통역을 잘못하는 줄 알았다는 것.
○…점심식사가 끝나면 난민들은 그들의 오랜 관습대로 낮잠(시아스타)을 즐긴다. 수용소에는 가족단위로 칸막이가 돼있지 않아 부부가 함께 수용된 난민들은 많은 불편을 느끼고 있다. 이들 난민부부와 젊은이들은 밤만 되면 수용소 뒤편의 빈 창고를 「데이트」장소로 이용하고 있다는 안내원의 이야기.
○…한국사정을 잘 모르는 일부 난민들은『부산이 한국의 수도냐』고 묻고 『부산이 수도가 아니면 서울은 얼마나 크냐』면서 많은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구호본부 직원들은 이제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데 익숙해질 정도인데 파월 기술자 때문인지 그래도 많은 난민들이 한국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했다.

<샤워장 이용 거의 안 해>
○…수용소에는 한꺼번에 4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샤워」장이 마련돼 있으나 「샤워」장을 찾는 난민들의 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 이들은 또 맨발로 운동장을 걸어 다니다가 그대로 교실로 들어가는 것이 버릇처럼 돼있어 수용소 내부가 불결하다는 것. 그래서 구호본부는 전염병의 예방에 가장 신경을 쓰고있다.
특히 월남이 「페스트」위험지역이기 때문에 몇 차례 쥐약을 놓기도 했고 하루는 쥐 한 마리가 잡혀 출생지 조사까지 하는 소동을 벌였으나 국산으로 판명되어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면회실에서는 매일 같이 회비가 엇갈린다. 월남에서 결혼한 교민들이 처자를 대리고 왔기 때문에 귀국자 명단에서 남편과 아빠의 이름을 본 한국의 처자들이 달려와 반갑고 씁쓸한 상봉을 하게 되는 것.
9년 전 야전장비 기술자로 파월 됐다가 작년 10월 귀국한 탁금환씨(46·경남 남해군 사등면 미조리)는 면회실에서 월남부인 「듀이」씨(32)와 2남2녀를 얼싸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맛보았다.
고향에 처와 2남4녀가 있어 갑자기 4남6녀로 식구가 늘었으나 본처의 호의로 같이 살기로 한 탁씨는 싱글벙글.
이 또 20억「피아스타」재산을 가진 부호의 딸인 「톤·누·난해」여인(25)은 「사이공」에서 한국인 남편 서위상씨(41)와 떨어져 3살 짜리 아들과 귀환했는데 지난 17일 갑자기 본처 김모씨(36)의 면회요청을 받고 쑥스러운 첫 대면을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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