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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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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그런데 나는 치훈에게 입단을 하면 아버지를 동경에 모셔와서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물론 전력을 다해서 대국에 임하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입단이 어렵다는 중론이었기에 그냥 약속을 해버렸다. 그런데 1국1국 치훈이 이겨서 입단가능성이 짙어감에 따라 오히려 나는 그 걱정이 앞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직업이 없던 아버지가 여권발급을 받을 수가 있을지 의문이었고 왕복비행기표 등 여비문제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임해봉 9단이 입단했을 때는 장개석 총통으로부터 병역면제와 국민훈장을 받았다고 하는데 바둑의 발생지인 자유중국과 우리 나라와는 여러 면으로 틀리는 점이 많기 때문인가? 형으로서 또 선배 기사로서 나는 치훈의 세계적인 쾌거에 대한 보상으로라도 그리던 부모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아도 도일이 불가능했다.
내가 일본에 와서부터 친부모 이상으로 돌보아주시던 천도정차랑 자민당 부총재가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서둘러서 5월말께 아버지만 도일하게 되었다. 그분은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치훈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은 고마운 분이었다.
1968년5월 본국의 각 신문에는 「조상연 4단 일본귀화설」이란 기사가 일제히 보도되어 물의를 일으켰었다.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천도정차랑 부총재 등 정계 거물들의 후원이 컸다는 점과 병역문제로 여권기간연장이 잘 안되는 데다가 허락인지 거절인지 모를 통지가 신청 후 1년이 지난 뒤에야 오는 바람에 일본체류 신청을 못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주위에서는 귀화를 권유했고 모든 꿈을 버리고 귀국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키위해서 권유를 받아들이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하기로 결심하고 준비를 했었다. 그랬던 것이 일본정부의 호의로 특별체류허가가 나와 일본에서 영주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사로서 대성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을 치훈은 그 누구보다 빨리 정확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큰형인 내가 기사로서 활약했기 때문에 빨리 바둑에 소질이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고 개인적인 애정을 포기하고 세계적인 기사를 만들어 보겠다는 아버지의 집념과 6세부터 바둑공부에 가장 유리한 일본에서 제일 실적이 있는 「기다니」선생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그야말로 이 세상에 바둑을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다. 이러한 좋은 조건에 본인의 노력이 합쳐져 기사로서 차근차근 단련되어갔다.
그 결과 냉정·침착·인내력·판단력 등 모든 것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초단부터 5단까지 최단거리 승단은 물론 신기록이었고, 승단뿐 아니라 실력도 당당하게 쌓아갔다. 5단이 되면서부터 각 신문기전에서 두각을 내기 시작, 특히 조일신보사 주최의「프로」십걸전에서 제8위로 입상한 것은 특기할 일이었다.
별항기보의 「하시모도·쇼지」(교목창이) 9단은 관서기원의 대표적인 기사로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들어온 사람.
현재 「십단」「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서반의 장고파로 유명하다. 그의 바둑은 제한시간을 충분히 사용하는 기풍이며 특히 「프로10걸전」는 인연이 많은지 매년 입상을 하고 「팬」투표에서 당선되는 등 대활약을 해왔다.
72년 제10기 「프로걸전」에 올라간 치훈이는 이상하게도 백번이 많아 5단짜리가 쟁쟁한 9단 진에게 백으로 두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치훈이는 예선 최종국에서 「가노」(가납가덕) 9단을 깨고 본선에 들어가 「하시모도」9단과 「가지와라」(미원무웅) 9단 등 3명의 9단진을 연달아 물리쳐 화제를 일으켰었다.
별항 기보의 「하시모도」9단은 치훈에게 흑으로 아깝게 두집반을 지고는 느끼는 바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밤 늦게까지 국후 검토를 한 다음에도 그는 집에 돌아갈 생각을 않고 혼자서 새벽까지 바둑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그 후 「하시모도」9단은 다음해 「사까다」9단을 물리치고 「십단」「타이틀」을 차지했다. <조상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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