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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오럴 해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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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통역에 얽힌 웃지 못할 이야기들 몇 토막.

몇년 전 어느 증권사 회장이 런던에 갔다. 현지 금융인들과 만나 일 관계 논의도 하고 식사도 했다. 그의 회사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간부가 통역으로 항상 곁에 있었다.

그 통역이 죽을 맛이었다. '서양 사람과의 대화는 조크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회장이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매번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웃어야지, 웃지 않으면 그건 통역을 제대로 못한 탓이었다.

영어로 옮길 재간은 물론 좌중을 웃길 도리는 더더구나 없었던 그 간부는 결국 궁하면 통한다고 다음과 같은 영어를 구사했다.

"우리 회장이 농담을 한마디 했는데 여러분들이 웃지 않으면 나는 돌아가서 모가지다."

폭소가 터졌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회장은 간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자네 영어 하나 똑 부러지는군."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시절 한.미 정상회담이 열릴라치면 수석비서관들은 이중으로 '과외 공부'를 시켜야 했다. 우선은 YS에게, 다음으로는 통역에게. 주요 의제와 우리 입장 등을 YS가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한 언사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영 불안해서였다.

결국 통역은 대통령보다 더 오랫동안 더 많은 분량의 '과외 공부'를 단단히 받곤 했다. 정상회담에서 YS가 딴소리를 하면 '옳은 소리'로 바꿔 옮기기 위해서였다.

또 예컨대 "미국이 북한에 '질질 끌려다녀서는' 안된다"는 식의 거친 말을 세련된 외교 수사로 바꾸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회담 후 양쪽 실무자끼리 만난 자리에서 "당신네 대통령 말과 당신 통역이 어째 좀 다르다"는 말을 듣고 뜨끔한 적도 있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부시 미 대통령과 5월께 정상회담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토론의 달인'이라 불리는 盧대통령과 '언어 장애'라는 꼬리표가 붙은 부시 대통령이 만나면 어떤 내용의 대화가 어떤 식으로 오갈까. 양국 간 입장 조율만큼이나 두 정상의 화법(話法) 다듬기는 중요하다.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같은 표현에 신중해야 하는 것처럼 盧대통령도 자신의 등록상표 같은 독특한 화법 대신 첫 워싱턴 데뷔에 맞을 새 화법을 몸에 배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맞습니다, 맞고요'식의 표현부터가 금물(禁物)이라는 외교관들이 많다. 일단 거듭해서 긍정을 한 뒤 국면을 뒤집어 자신의 다른 견해를 설득하는 화법을 그대로 외국어로 옮겼다간 큰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정상회담에서야 그럴 리 없겠지만, 평검사들과의 토론 때 튀어나온 것처럼 '모욕감을 느끼지만 웃으며 넘어가자''막 하자는 거지요'와 같은 '순발력'이 발휘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YS와는 정반대라고 할 이 같은 盧대통령의 화법을 두고 '오럴 해저드(Oral Hazard)'라고 하는 네티즌을 만난 적도 있다. 지나치게 자신있어하는 말 때문에 위험에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토론과 설득에는 정확한 의사소통이 첫째다. 언어가 다르고, 화법이 튀는 사람들끼리는 더 그렇다. 하물며 정상회담에서랴.

盧대통령의 독특한 국내 화법만큼이나 화려하고 세련된 국제 화법을 기대한다. 통역이 대통령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일은 이제 없을 것이지만.

김수길 기획담당 부국장